IMF보다 더한 불황이라지만, 그래서 영 추석 같지 않다고 너나 없이 푸념이지만, 누가 뭐래도 “더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는 추석이다. 설을 빼면 일년에 딱 한번 저마다 떨어져 사는 일가붙이들이 한데 모여 북적거리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조상을 한번쯤 되돌아 보는 날. 국가보안법 폐지나 이라크 파병 같은 ‘날선’ 이야기들도 오가 겠지만, 아무래도 서로 인상 쓰지 않고 가벼운 정담(情談)으로 그치기엔 그저 TV 드라마 이야기가 제일일 듯 싶다.그 중에서도 불륜과 혼전동거라는 2004년 한국의 현실이자 민감한 ‘성감대’를 건드리며 시청률 40%를 넘는 시청률로 막판 인기 1위를 달리고 있는 KBS 2TV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은 이야기거리에서도 역시 1순위.혼전동거 사실이 시댁에 알려지면서 하루아침에 구박 덩어리가 된 은파(한가인)를 용서해야 하느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은파 역을 눈물연기로 해내고 있는 탤런트 한가인(22)이 답했다.
“얼마 전 트럭이 치일 뻔한 은파를 장수(송일국)씨가 밀쳐내고 대신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에 빠지는 장면을 찍었어요. 지금 상황에서 모든 일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요.”
한가인은 “은파의 상황이 이혼한 거나 마찬가지인데다, 그걸 속였으니 시부모님이 두 배의 배신감을 느낄 만도 해요. 아무래도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과거 있는 여자라고 무조건 매도하는 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착하고 시부모님에게도 잘하는 은파를 당연히 용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한가인이 은파의 상황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실제 은파라면요? 죽고 싶겠죠. 그런데 아무리 이모저모 생각을 해봐도 저라면 은파처럼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결혼 전에 장수에게 동거사실을 다 말하는 게 정답 아닐까요. 이해해 주느냐, 못하느냐는 장수에게 달린 거고요.” 신세대인 그녀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게 그 뿐이 아니다. “은파는 70ㆍ80년대 전형적인 비련의 여주인공이죠. 그런데 2004년인 요즘에도 좋아해 주시는 걸 보면 사람들에겐 옛스러운 정서가 남아 있나 봐요.”
어쨌든 요즘 한가인은 하루하루가 눈물 바람이다. “58회까지 찍었는데 그동안 연기하면서 한 회도 울지 않았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동거하는 남자가 괴롭혀서 울고,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데리고 온 자식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서 울고, 이번엔 동거사실이 밝혀져서 울고…” 은파의 눈물연기에 시청률이야 쑥쑥 올랐다지만, 본인은 “세트장에서 막 정신없이 울다가 쉬러 나와서 웃고 떠들고, 다시 촬영하면 울고 하다 보니 요즘 정신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할 정도라고 했다.
덕분에 미인도에서 금세 빠져 나온 것 같은, 갸름하고 청순한 그녀의 얼굴도 영 말이 아니다. “동거사실이 들통난 장면을 찍을 때 장염에 걸려서 1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는 바람에 살이 쪽 빠졌어요. 감독님이 ‘적합한 시기에 아파서 아주 불쌍해 보인다’고 그러시더군요.”
게다가 경희대 호텔관광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그녀는 일주일에 5, 6일은 밤늦게까지 촬영하고 하루는 학교에 가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따져보면 이제 드라마 ‘햇빛사냥’ ‘노란 손수건’과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출연한 게 고작인 스물 두 살의 젊은 배우가 맡기에 ‘은파’의 그림자는 지나치게 깊고도 어둡다. “어떤 분들은 어린 나이에 왜 이런 역할 하느냐고 그러시는데 소화하기 힘든 역할 하다가 가벼운 건 해도 거꾸로는 못하죠. 연기자로써 바탕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을 삼고 싶어요.”
한가인은 ‘은파’라는 캐릭터를 통해 “연기에 자질이 있는지 하나씩 확인하고 있다. 아직 젊으니까 2, 3년은 투자해 보려고 한다”고 했다. “연기자는 연기만 할 때 가장 빛난다”고 스스럼 없이 말할 줄 알아서 일까,한가인의 눈물은 여전히 시청자들을 울리고 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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