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태를 자르고/ 길에서 배시시 솜털을 벗고/ 길에서 초경을 맞으며/ 길에서 살아와/ 길은 밥이고 잠이며/ 길은 꿈이고 강이며/ 길은 정분이고 산맥이며/ 길은 장단이고 한숨이며/ 길은 가락이고 눈물이며/ 길은 너름이고 채찍이며/ 길은 버슴새였나니…(넷째마당 ‘하염없는 물길 몸길’의 ‘저승패의 노래’중에서)”
19세기 중엽 천출 여성으로 사당패로 떠돌며 스물 여섯 해를 불꽃처럼 살다 간 예인 바우덕이. 조선팔도를 그녀의 어름판(줄타기) 아래 두고, 민초들의 피멍 든 가슴을 소리며 살판으로 달랬던 그녀의 삶이 한 편의 유장 도도한 장시 ‘사당 바우덕이’로 부활했다.김윤배 시인이 1990년 초 ‘현대시학’에 연재했던 원고를 10년 넘게 호흡을 죄고 풀고 리듬을 다스려 시집(문학과 지성사 발행)으로 묶었다.
시는 모두 아홉 마당. 첫 마당은 바우덕이의 생애를 아우른 서시 격이고 둘째, 셋째 마당은 동학농민운동에 연루돼 참혹하게 처형되거나 자결하는 조부와 부모의 생애를 담았다. 넷째 마당에서 아홉 살 고아 바우덕이는 사당패에 들고, 다섯째 마당에서는 바우덕이가 어름타기를 배우는데 은퇴한 원로이자 기둥서방인 저승패 비가비의 호통이 이어진다. “네 이년/ 그래도 발끝에/ 오만 생각 모으느냐… 땅줄 못 타는 년이/ 어찌 어름 탄다더냐/ 땅줄 타고 나면/ 핏줄 타야 허는 게고/ 핏줄 타야 어름사니인 게야”
이어 7ㆍ5조, 5 ㆍ7조를 넘나드는 유장한 사설이 이어진다. 열 세 살 애사당 바우덕이는 여섯째 마당에서 데뷔무대를 갖고 이름 모를 양반에게 몸을 주는데, 줄타는 장면은 힘진 4ㆍ4조에 실렸다.
“장단 먹인 조선줄/ 출렁출렁 살아나고/ 줄배 맞춘 바우덕이/ 뒤를 훑고콩 심고/ 화장 사위 병신걸음…” 양반은 욕심을 채운 뒤 은전 한 닢을 내놓는다. “꿈, 꿈이었으면/ 일장춘몽이었으면/ 경련 멎은 작은 손에/ 쥐여준 은전 한 닢/ 촛불 아래 빛나고/ 강 같은 슬픔 밀려들어/ 죽음처럼 버려진 작은 육신”
일고여덟 마당에서 사당패 수장인 꼭두쇠에 앉아 버나판(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판, 덧뵈기판(탈놀이), 덜미판(꼭두각시놀음)으로 “판마다 상것들 메마른 혼 적시고/ 판마다 상것들 울컥한 가슴 일으키고/ 판마다 상것들 어깨들림 신명바람…”으로 ‘삼남의 꺽진 남정네들’을 쥐락펴락했던 그녀는 아홉째 마당에서 폐병, 창병 깊어 어름타기 도중 떨어진다. 그는 평생 간직해온 은전 한 닢을 마지막 기둥서방인 곰뱅이쇠(패의 2인자)에게 건네면서 집으로 돌아가라 이른 뒤 숨을 거둔다.
시인은 사물놀이며 사당패놀이패를 일삼아 찾아 다니며 그네들의 정서와 말을 익혔다. 전통 춤사위에서 휘저어 출렁이던 한삼이 일순 정지하며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순간을 일러 ‘버슴쇠’라 한다는 것도, 그렇게 배워 시에 넣었다고 한다.
평론가 이혜원씨는 “ ‘국경의 밤(김동환 작)’과 ‘금강(신동엽 작)’을 잇는 민중 서사시이면서, 완성도 높은 일관된 서사구조와 시종 긴장을 잃지 않는 말의 리듬으로 기존의 작품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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