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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9>데이콤 초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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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9>데이콤 초대사장

입력
2004.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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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정보통신 업무를 전담하는 한국데이타통신㈜이 설립됐다. 오 명 체신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데이터통신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된 81년 8월 이후 7개월 만이었다.위원회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민영 회사’의 형태를 결정하고 투자기업 유치에 나섰다. 그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그때만 해도 첨단 산업인 데이터 통신이 돈벌이가 되는 장사라고 생각한 기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체신부에서 통신 관련 회사들을 불러 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참여를 독려한 뒤에야 대기업들이 겨우 출자에 동의했다.

그런 다음 한국통신과 한국방송(KBS) 등 정부 관련 기업이 30%를 출자, 60억원의 자본금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데이터통신㈜가 발족하게 됐다. 이 회사는 영어 약자로 데이콤(Data Communication)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이 회사의 초대 사장을 맡았다. 정부는 사장의 조건으로 전문성과 비즈니스 마인드를 꼽았다고 한다. 나는 사장으로 추천된 81년 말부터 본격적인 창업 준비에 나섰다.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했다. 우선 체신부 7층 별실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고 김대규, 백석기, 김광련, 백문성, 이명규 등 초창기 핵심 멤버 7명을 뽑았다. 이 때 나는 전에 근무하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나 전자기술연구소에서 사람을 빼왔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연구소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발탁하고 나머지는 각 방면에서 유능한 인사들을 골라 뽑았다.

창업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데이터 통신 분야는 그때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었다. 국내에 참고할 만한자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외국의 자료를 수집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물론 정부는 설립 계획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민간 기업에 맞게 조직과 보수 규정, 사업 계획 등을 다시 짜야 했다.공익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동시에 정보기술(IT) 산업의 선도역할을 할 수 있는 조직이 목표였다. 정보 통신에 관한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정리하는 일 못지않게 창업에 따른 복잡하고 까다로운 업무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임시 사무실은 구석진 곳에 있어 ‘골방’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창립 멤버들은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야 퇴근하기 일쑤였다. 밤을 새는 일도 허다했다.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이 생길 만큼 고생했던 당시를 ‘골방시대’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골방’이니 ‘골방팀’이니 하는 말은 지금도 데이콤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 할 때 곧잘 등장한다. 특히 내겐 향수어린 애칭으로 남아 있다.

쓸만한 인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정보통신 관련 기술자나 경험자는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망이 불투명한 탓도있지만 초기에는 월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엄청난 돈을 미끼로 사람을 빼 간다는 말을 퍼뜨리는 회사가 하나 둘 나타나 입장은 더 곤란해졌다.그래서 나는 직원들의 월급을 당시 잘 나가던 금성사 수준에 맞추겠다고 아예 공식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5월 신입사원을 공채 하는 등 회사의 틀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누구도 밟아 보지 않은 길을 가는 건 고생이었지만그 이상의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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