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가을 체신부의 오 명(현 과학기술부 장관) 차관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는 “데이터 통신을 주관할 통신 회사를 민영으로 운영하려 하는데 맡아 줄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고관 대작 관료들이 데이터 통신이 뭔지도 모르던 그 시절 오 차관은 미래를 내다보고 대책까지 생각해 내다니,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됐다.나는 데이터 통신 서비스라는 말에 솔깃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겠다”며 즉답을 유보했다.당시 나는 정보화 사회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런 내게 정보화 사회 실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데이터 통신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80년 7월 삼보컴퓨터를 설립해 ‘할 일’이 많았다. 정보기술(IT)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컴퓨터 산업의 꽃을 피우겠다는 욕심이 차고 넘쳤다. 개인적으론 막 틀을 잡기 시작한 삼보컴퓨터에서 손을 뗀다는 건 여간 큰 손실이 아니었다. 민영이라지만 체신부와 관련 있는 기업을 맡을 경우 특혜 시비에 말려 들 소지도 다분했다.
그러나 오 차관의 설득에 마음을 굳힌 나는 순수 데이터 통신 외에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큰 사업을 동시에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바로 정부 모든 부처의 전산화 사업을 도맡아 세계 최고 수준의 행정전산 시스템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나는 오 차관에게 “행정 전산화를 새로 생기는 데이터 통신 회사에 통째로 맡겨 준다면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장고 끝에 이를 허락했다. 민간 회사들의 이권과 관료들의 영역 싸움 등이 난마처럼 얽힌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단일 회사에 맡긴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때 행정 전산화에 욕심을 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정보화 사회가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정부 먼저 시범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당시 행정 전선화 사업은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게 돼 있었다. 정부는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낙후된 정보화 환경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시간 문제다. 정부에서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려면 타당성 조사와 예산 편성 등에만 꼬박 2년이 걸렸다.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3년 정도 잡으면 모두 5년이 필요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정보화는 그렇게 한가한 사업이 아니었다.
또 정부 각 부처의 전산담당 책임자는 대부분 좌천됐다고 여겨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프로그래머들도 공무원의 낮은 급료를 핑계 삼아 기술만 익히면 돈을 더 주는 민간 기업으로 옮기던 때였다. 그러니 능률은 떨어지고 내부의 기술력이 쌓일 턱이 없었다.
당시에는 각 부서마다 독자적으로 컴퓨터를 구입, 부처간은 물론 부서간에도 정보교환이 이뤄지지 않았다. 민간 기업들도 정부의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저가 덤핑을 통해 따내는 게 보통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만족할만한 제품이 나올 리 없었다. 대부분의 장관들은 형편 없는 제품을 보고 “전산화라는 게 별 쓸모가 없다”고 판단, 마지 못해 프로젝트를 꾸려나가는 실정이었다.
행정 전산화 사업도 도처에 가시밭이 널려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그대로 주저 앉을 수 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내 머리 속에는 멋진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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