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19일 제14차 중국공산당대회 기자회견장.장쩌민(江澤民) 당시 총서기는 무려 3단계나 건너뛰어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된 후진타오(胡錦濤)를 가리키며 “이 젊은이는 불과 49세”라고 소개했다. 당황한 외교부 관리는 후진타오가 여자인 줄 알고 ‘젊은 여성(young woman)’으로 통역했다. 외신 기자들은 ‘후가 누군가(Who’s Hu?)’를연발했다. 그 만큼 후진타오는 베일에 가려 있었다.
거대 중국의 당ㆍ정ㆍ군이 그의 수중에 떨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후진타오를 만났다는 유력 한국 정치인은 “만나면 더 헷갈린다”고 말했다. 마오쩌뚱(毛澤東) 등 인민복 차림의 지도자들보다 늘 말쑥하게 신사복을 입는 그를 더 모르겠다는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도 후진타오를 온화하면서 지적이고, 합리적 소신을 갖췄다고 호평했지만, 결국은‘미스터리 인물’로 평했다.
후진타오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태자당(太子黨ㆍ혁명 원로의 자녀)과 상하이방(上海幇)이 득세하던 중국 정치판에서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까지 몸을 극도로 낮췄던 이력 때문인지 모른다. 국가부주석이던 2001년 유럽5개국 및 미국 등 3개국 순방 때는 장 전 주석의 체면을 고려해 연설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낮은 소리의 대가(低調大師)’다.
하지만 솨이거(帥哥ㆍ잘 생기고 멋진 남자) 풍모에 일견 유약해보이는 이미지의 뒤편에는 원칙과 국가이익은 양보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과 쉽게 소신을 굽히지 않는 배짱이 숨어있다. 단적으로 그는 1989년 3월5일 시장(西藏) 자치구 당서기 시절 티베트 독립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헬멧 차림으로 시위진압을 진두 지휘, 행동하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또 국가부주석 시절인 1995년 5월 미국이 유고의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을 오폭한 날 밤에는 TV에 출연, “야만적 범죄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지난해 4월 사스 파동 때는 장 전주석의 군부가 이를 은폐한 사실을 들춰내는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탈 권위적 면모도 두드러진다. 그는 ‘인민이 권력을 사용하고, 인민과 공감대를 이루고, 인민을 위해 일을 한다’는 ‘신(新) 삼민주의’를 주창하면서 직접 민중을 만나고 있다.
이런 다면적 모습은 성장환경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 상하이(上海)에서 차(茶)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생모가 난산으로 숨지고 계모 역시 7세 때 잃은 탓인지 내향적 성격이었다고 한다. 마오쩌뚱 시절 그의 부친 후쩡위(胡增玉)은 ‘소규모 자본으로 가족이 경영하는 소업주(小業主) 계급’으로 분류됐다. 소업주 계급은 혁명의 주체세력도, 타도 대상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계급이다.
이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장쑤(江蘇)성 타이저후(泰州)로 이사를 간 그는 5세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타고난 성실성과 명민함으로 학창시절 내내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첫 인생의 전환점은 18세 때인 1959년 명문 칭화(淸華)대 수리공학과 진학이었다. 대학시절 공산주의청년단에 입단한 그는 교수들의 정치성향을 감시하는 교도원으로, 문화공작단 서기로 활동했다. 중앙정부 주최 연회에서 독무를 출 정도로 성격도 활달해졌다. 향후 권력구축의 밑거름이 됐던 ‘칭화방(淸華幇)’ 네트워크도 이 때 구축됐다. 부인 류융칭(劉永淸)을 만난 것도 이 때다.
하지만 66년부터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의 광풍에는 예외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정치 지도원으로 산뜻하게 사회에 진출한 그는 68년 서부의 오지 간쑤(甘肅)성 수력발전소 건설공사장으로 사실상 하방(下放ㆍ지방으로 좌천)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간쑤성 생활 14년은 결국 출세의 디딤돌이 됐다. 그는 그곳에서 공산주의청년단 성위(省委) 서기까지 올랐다. 게다가 중국은 역시 ‘관시(關係ㆍ연줄)’의 나라였다. 당시 간쑤성 최고권력자이던 국가원로 쑹핑(宋平)의 눈에 들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쑹핑의 후원 아래 40세에 최연소 당 중앙위원에 발탁된 그는 42세 때(85년) 서남부 최빈 지역인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전출됐으나 92년 중앙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2년 후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사실상 제4세대 지도자로 낙점됐고, 이후 린뱌오(林彪)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 실패한 2인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이동준 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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