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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민생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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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민생 현장

입력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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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지방을 돌며 민정을 살피고 악정을 바로잡는 암행어사는 왕으로부터 직접 봉서(封書) 사목(事目) 마패(馬牌) 유척(鍮尺)을 받는다. 남대문을 나서야 뜯어볼 수 있는 봉서에는 아무개를 어느 지역의 암행어사로 임명한다는 내용과 임무가 적혀 있다.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며, 마패는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서,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 검시할 때 쓴다. 암행어사는 미복(微服)으로 민정을 살피며 필요할 때 출도(出道)해 신분을 밝히고 왕을 대신해 임무를 수행한다. 암행어사가 수행한 직무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서계(書啓)는 왕에게 올려져 행정 개선의 자료로 활용된다.■ 세상살이가 어려우면 어김없이 높으신 분들의 민생현장 투어가 유행한다. 추석을 앞두고 여야 지도자들과 각료들이 민심을 읽겠다며 경쟁적으로 복지시설 시장 생산현장 등을 둘러본다.상인이나 근로자들과 악수를 하거나 배추나 생선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게 고작이다. “요즘 많이 힘들죠?” “물가 많이 올랐습니까?” 등의 단발성 질문을 던지며 주마간산 식으로 민생현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사람들에게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피부에 닿을 리 없다.

■ 옛날 왕이나 재상들은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변복(變服)을 하고 궁을 빠져 나왔다.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참모습을 살피기 위해서다. 왕이 아니더라도 지체 높으신 분 앞에 서면 작아지기만 하는 서민들이 군졸들과 신하를 거느린 높은 분 앞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제대로 할 까닭이 없다. ‘원님 말씀은 항상 옳습죠’식의 대답을 듣지 않기 위해 변복을 하고 신분을 감춘 채 민생현장을 살폈던 지혜를 오늘의 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음이 서글플 뿐이다.

■ 국민들은 전시용 이벤트성 민생투어에 신물이 난다. 이런 장면이 나오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송사들은 주요뉴스로 내보낸다. 국민들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지, 가장과 주부 노릇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싶다면 배지 떼고 혼자서 거리에 나가 보라. 서울역 지하광장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포장마차에서 한 시간만 소주잔을 들고 귀를 열어보라. 시민들이 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외면하려 드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방민준 논설위원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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