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江澤民ㆍ78)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이 19일 사임,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직후 당 총서기에 오른 이래 15년간 중국 권력의 1인자로 군림해온 최고 권력자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공산당 간부 자제인 태자당(太子黨) 출신인 장은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일찌감치 '혁명 3세대의 핵심'으로 지목돼 왔다.
문화대혁명 때 한동안 밀려나 있던 장이 권력의 핵심인물로 떠오른 것은 85년 상하이(上海) 시장 취임과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시장 재직 시절 상하이를 중국 최고의 경제ㆍ금융 중심지로 발전시킨 공로로 시 당서기로 승진했으며, 87년에는 공산당 정치국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춘제(春節) 때마다 상하이에 들르던 최고 권력자 덩과는 이때 인연을 맺었다.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린 톈안먼 사태는 그의 강성 이미지를 대내외에 알린 사건이었다.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그는 베이징(北京)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이에 동조하는 논조를 편 상하이 세계경제도보 총편집을 해고하고 노동자 감찰대로 하여금 이 신문을 장악토록 하는 강경대응을 펴 덩의 눈에 띄었다.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의 뒤를 이어 불과 2개월 뒤 일약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된 것도 톈안문 사태가 발판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부터 장은 최고 권력을 향한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11월 덩이 맡고 있던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고, 90년 4월 국가군사위원회 주석을, 93년 3월에는 국가주석직까지 거머쥐면서 당(黨) 정(政) 군(軍)의 모든 권력을 한손에 쥐었다.
장은 집권시절 덩의 개혁ㆍ개방을 이어받아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공산당이 선진생산력(자본가) 선진문화발전(지식인) 광대한 인민(노동자ㆍ농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3개 대표론은 그의 개혁ㆍ개방 정책을 집약한 이론으로 꼽힌다.그러나 성장우선 정책으로 인한 소득 불균형, 만성적인 재정적자, 환경오염을 부추긴 부정적 지도자로도 인식된다. 폭발일보 직전인 지금의 도농별ㆍ계층별ㆍ지역별 불균형은 장의 경제성장 정책이 낳은 대표적인 그림자들이다. 권력형 부정부패, 파룬궁(法輪功) 등 종교탄압 등도 잇따랐다.
26년 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시 출생으로 아버지가 명의였던 장은 20세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47년 상해 쟈오퉁(交通) 대학 전기과를 졸업한 뒤 구 소련과 루마니아에서 유학했다.한때 상하이의 한 미국인 상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의 러시아어와 영어 실력은 유학시절과 이때 닦았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쉬차이허우, 군사委 부주석 전격발탁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를 맞아 쉬차이허우(徐才厚ㆍ61) 신임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중국 4세대 지도부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했다.
인민해방군 정치부 주임으로 일했던 그는 19일 4중전회에서 후 주석이 군사위 주석을 승계함에 따라 공석이 된 부주석에 전격 임명됐다. 이 같은 발탁은 당 내부에서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오른팔인 쩡칭홍(曾慶紅) 부주석이 군사위에 합류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깨고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가장 젊은 실세가 된 것이다.
1943년 랴오닝성 와방덴(瓦房店) 출신인 쉬 부주석은 후 주석과 동갑이다. 중국‘웨스트 포인트’로 꼽히는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하고 71년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90년 군 정치위원으로 승급 되는 등 대표적인 인민해방군의 엘리트로 평가 받아왔다.
93년 당 중앙선전ㆍ사상공작 영도소조의 성원으로 임명된 그는 장 주석의 총애를 받아 해방군보사의 사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93년 인민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거쳐 97년 공산당 제15기 중앙위원과 총정치부 상무 부부주임 등을 역임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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