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서구에서도 드물게 유혈 혁명없이 민주적 변혁에 성공한 것은 지배계층이 막대한 세습재산을 사회에 내놓는 대신 시민사회는 그들의 고상한 신분을 인정하는 명예로운 타협을 이룬 덕분이다.영국 귀족들은 시민의회가 세습재산에 부과한 가혹한 세금을 수용, 부의 축적과 세습을 삼간 채 국방의무를 다하고 기부와 봉사에 힘 쏟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통을 쌓았다.상속세는 이처럼 편재된 부의 세습을 막아 자본주의 사회의 평화와 민주 발전에 토대가 된다. 봉건적 굴레 없는 시민사회로 출발한 미국이 상속세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고, 어느 사회보다 활발한 기부행위를 유도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 초 타계한 설원량 대한전선그룹 회장 유족이 사상 가장 많은 상속세 1,355억원을 내겠다고 신고, 화제가 됐다. 재계 30위 권의 중견그룹 오너 가족이 상속재산의 절반 가까이를 기꺼이 세금으로 낸다는 사실이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이다. 훨씬 큰 재벌 들이 변칙상속 논란 속에 기껏 몇 십, 몇 백억원을 상속세로 내는 데 그친 사회에서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인은 생전에 기업인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 적자 없는 내실경영과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또 창업 선대부터 재벌이었지만 자신과 아들까지 현역 군복무를 했다.유족들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법대로 세금을 내는 것일 뿐이라고 겸양하는 것도 이런 바탕에서 나온다고 본다. 앞서 1,000억원 대 상속세를 낸 교보생명과 태광산업의 경우에도 재벌 일가로서 는 남다른 도덕적 처신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돋보였다.
우리사회는 어느 때보다 심각한 부의 불균형과 계층간 갈등으로 통합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재벌은 물론이고 사회 모두가 제 소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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