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과실이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되면 술이 된다. 이렇게 보면 술의 기원은 인류의 탄생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인간이 마시고 즐기지 않는 술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 이전 마한 시대부터 풍성한 수확과 복을 기원하며 맑은 곡주를 빚어 조상께 먼저 바치고 춤과 노래와 술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28일은 한 해의 수확에 감사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추석. 우리 전통 술이 빠질 수 없는 명절이다. 이 시절에 맞춰 때마침 위스키 포도주 등이 장악한 국내 주류시장에서 우리 술들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우리 술의 맛과 멋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 달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우리술 페스티발’이 대표적인 행사. ‘우리 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공동대표 김성훈, 현명관,정광모, 조정래, 최불암)이 주최한 이 전시회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가 살아있는 전통술을 되살리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됐다. 전시된 술은 약주, 과실주, 증류주 등 145가지. 이 계절에 술의 풍류를 논하며 삶의 고단함을 달랬던 선현들을 생각하며 그 동안 잊혀져온 우리 술을 찾아가보자.● 전통술, 입맛의 변화
최근 우리 전통술 선호도를 보면 고도(高度)주에서 저도(低度)주로 옮겨가는 추세가 확연하다. 알코올 도수 20도 이상의 독한 술 보다는 10~20도 정도의 순한 술을 더 찾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도수가 적당하고 단 맛이 나는 과실주가 인기다.
이러한 흐름의 선두주자는 복분자주. 대표적 인기 과실주인 복분자 시장의 매출은 지난해 400억원을 넘었으며 시장규모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임익재 한국 복분자주제조협회 회장은 “위스키, 포도주 등 외국 술의 맛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복분자나 머루주 등 과실주들을 통해 우리 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우리 술들이 제대로 알려져 저변이 확산되면 외국산 술들에 맞설 수 있는 수출 품목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복분자주
장미과에 딸린 낙엽관목의 열매인 산딸기를 한방에서는 복분자(覆盆子)라 부른다. 열매를 먹고 요강에 소변을 보면 요강이 뒤엎어질 정도도 원기기강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복분자는 신장을 보하고 정기를 북돋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강을 생각하는 웰빙 추세와도 맞아 떨어져 복분자주는 요즘 국내 과실주 중 최고 인기를 누린다.
일반적으로 과실주라면 소주에 각종 과실을 넣어 숙성시킨 것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최근 복분자주의 90% 이상은 열매를 그대로 발효시킨 발효주이다. 연수당 복분자주의 경우 2002년 농림부가 주최한 ‘한국 전통식품 베스트5 선발대회’에서 술 부문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입안에 감기는 맛을 자랑한다.
최근 유행하는 것은 복분자주 온더락(On the rock). 술 잔에 복분자주를 따르고 얼음을 넣은 후 마치 칵테일처럼 마시는 것. 얼음 때문에 술맛이 시원하고 얼음이 녹을수록 맛이 더 순해진다.연수당 (062)943-3788 광주시 광산구
■ 머루주
머루는 포도의 원종으로 일컬어진다. 와인평론가들은 흔히 머루가 프랑스남서부에서 많이 생산되는 포도품종 바뉼스와 유사한 맛이라고 평한다. 경북 봉화군의 노종구씨는 아내와 함께 직접 머루주를 담근다.
와인처럼 상큼한 맛은 없지만 특유의 무거운 향과 맛이 머루주의 특징. 특히 부부가 일체의 향료나 첨가물을 넣지 않고 담그는 머루주는 머루 그대로의 맛을 살린 순수한 맛을 인정받는다.
올해 런던에서 발행된 한 와인리포트는 ‘감동적이고 신기한 와인’으로 묘사했고 일본의 유명 여행잡지 ‘여명’은 머루주 맛을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수한 맛’이라고 소개했다. 현재 일본에도 소량이긴 하나 수출하고있다. 부부가 직접 담근 술만을 판매하기 때문에 주문 택배로 주로 판매하고 봉화군 내에서만 물량을 유통시킨다.에덴의 동쪽 (054)673-8422 경북 봉화군
■ 거봉와인
천안이 주산지인 포도품종 거봉으로 담근 국산 와인. 일반 와인 색깔이 화이트이거나 레드 라면 거봉와인은 로제(Rose)와인처럼 핑크빛이 난다. 거봉으로 담근 와인 원액에 마스캇베리에라는 품종 원액을 조금 섞어 주면 보랏빛 와인으로 변한다.
보통 레드와인이 진하고 텁텁한 맛이 난다면 거봉와인은 맛과 향이 가볍고 뒷맛이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결코 달지 않다. 외국에서처럼 와인을 블렌딩하지 않고 슈트벤과 세레산 등단일 품종의 와인 맛도 곧 선보일 계획.두레앙 거봉와인 (041)585-8213 충남 천안시 www.duraean.co.kr
■ 대잎술
대나무잎에서 엽록소를 추출해서 만든 술. 대나무는 발효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곡물을 발효시킨 다음 거기에 대나무잎을 넣고 다시 숙성시킨다.
원래 대나무에는 향이 없다. 약간 비릿한 향이 날 듯 말 듯 한데 대잎술에도 오히려 발효된 곡물 향이 강하다. 약간 시큼한 듯 하지만 그 안에는 대나무잎이 가진 건강한 섬유질과 대나무 특유의 은은한 향이 담겨 있다.
따로 향을 추가하진 않는다. 특히 대나무 통에 넣어 술을 내놓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대나무숲에 들어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추성고을 (061)383-3011 전남 담양군
■ 앉은뱅이술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흰 소복을 입고 마셨다고 해서 소곡주라 불린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술의 하나.
찹쌀이 주원료로 메주콩과 엿기름 들국화 생강 등이 함께 들어간다. 단 맛이 강한 것은 감미료를 많이 넣어서가 아니라 당분을 섭취하고 자라는 효모의 양을 적게 해 끝에 당분이 많이 남도록 하는 특유의 발효과정 때문이다.
중후하고 빼어난 감칠맛은 한산소곡주만의 자랑이다. 술이 달짝지근한데도 알코올도수는 18도로 제법 높은 편이어서 달콤한 맛에 취해 술술 넘기다 보면 어느새 취해 버린다. 먹을 때는 모르는데 마시다 보면 다리가 휘청거려 못일어선다고 일명 ‘앉은뱅이술’이라고도 불린다. 한산소곡주 (041)951-0290 충남 서청군 한산면 www.sogokju.co.kr
■ 안동소주
전통 소주도 이젠 칵테일로 마신다. 신세대 젊은이들을 겨냥, 안동소주에도 레몬이나 매실액기스를 넣어 섞어 마시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 안동소주에 얼음을 넣고 탄산이 들어간 토닉워터를 섞는 것도 새로운 맛을 느껴볼 수 있는 시도다.
전통소주 하면 독하다는 인식이 강한데 이젠 단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좋아하지만 고도주라는 이미지를 탈피, 알코올 도수를 낮춘 소주 맛을 선보이고 있다. 45도 말고도 최저 35도, 25도 등 3가지 소주를 따로 낸다. 앞으로 안동소주도 과실주나 오크통에 숙성시켜 위스키 같은 맛과 향이 나는 제품을 낼 계획.안동명주영농법인 (054)856-6900 경북 안동시
/박원식기자 parky@hk.co.kr
◇술에 관한 상식
우리 술은 흔히 5가지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증류주란 알코올 발효가 끝난 술을 가열시켜 증류한 것인데 우리의 전통소주나 중국의 고량주 등이 이에 속한다. 약주란 발효시켜 맑게 여과한 술을 가리킨다. 약용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술이나 약으로 음용하는 술이라고 약주라 이름 붙여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상식.
과실주와 리큐르는 일반인들이 가장 혼동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해 일반 증류주나 알코올에 각종 과실이나 약초, 향초 등을 넣고 제조한 술은 리큐르라 불린다. 보통 집에서 소주에 과실을 넣고 담그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과실을 순수하게 발효시켜 만드는 것은 과실주라고 부를 수 있다. 밥에다 누룩을 섞어 탁하게 빚은 술은 탁주라고 불린다.
한편 주세법은 ‘주정(酒精)과 알콜 성분 1도 이상의 음료인 주류에 대하여는 주세를 부과한다’고 규정하고 주류의 종류를 주정, 발효주류로서 탁주ㆍ약주ㆍ청주ㆍ맥주ㆍ과실주, 증류주류로서 소주ㆍ위스키ㆍ브랜디ㆍ일반증류주ㆍ리큐르,기타주류 등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박원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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