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광해군이 과거 최종 합격자 33명에게 물었다. 이에 선비 임숙영은 답했다. “왜 스스로의 실책과 국가의 허물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느냐”며 나라의 병은 왕에게 있다고 직언했다. 그는 “사대부들이 이리 저리 찢어지고 나뉘어 각기 붕당을 세워 오직 뜻이 맞는 사람만 붙여주고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 서로 마음을 합해 공경하고 화합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며 파벌싸움이 심한 조정을 공격했다.■그는 이어 “왕비의 일가붙이와 후궁의 겨레붙이들까지 은총과 혜택을 바라면서 관직과 봉록을 얻으려 한다”며 인사의 부패상을 지적했다. 화가 난 광해군은 그를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할 것을 명령했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의 여파로 민심이 흉흉했던 중종대에는 ‘술의 폐해를 논하라’라는 논제가 주어졌다. 이에 선비 김구는 “폐해는 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양하지 않은 마음 탓이다. 지도자가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술을 법으로만 금지했기 때문에 술의 폐해가 커졌다”고 답했다.
■동양 철학을 전공한 김태완씨가 번역하고 해설한 ‘책문-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라는 책이 보여주는 왕과 젊은 선비들의 문답 중 일부다. 책문(策問)은 조선 때 대과에 합격한 과거 최종 합격자들의 성적을 가리기 위해 왕이 주재하는 전시에서 왕이 직접 출제하는 문제로, 왕이 묻고 선비가 답했다. 왕은 국가 경영에 있어 무엇이 가장 절실한가에 대해 진지하게 젊은 선비들의 지혜를 구했고, 패기만만한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 견해를 밝혔다.
■오늘날 책문을 시행하면 어떨까. 최고 권력자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김심(金心)’ ‘노심(盧心)‘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좋은 전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토론도 직언도 없는 일사불란한 사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열린 마음으로 널리 의견을 구했던 절대권력자와 모든 것을 던져 답했던 선비들의 정신이 갈수록 그리워진다.
이상호 논설위원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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