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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4>전산화 주계약자 낙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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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4>전산화 주계약자 낙착

입력
2004.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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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한 김명년 서울시 부시장은 경찰국장과 관광운수국장, 교통자문위원회에 내가 작성한 ‘교통신호 시스템 국산화 계획서’를 돌렸다. 그리고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뒤 설명회를 가졌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1978년 11월 중순 무렵이다.반응은 역시 썰렁했다. 교통자문위원이라는 사람들조차 “교통신호 전산화같은 사업은 선진국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우리 같은 후진국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공무원들도 독자 개발은 너무 위험하니 외국 기술을 도입한 뒤 국산화에 나서자는 특유의 2단계론을 들고 나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공무원 사회는 모험을 싫어했다. 공무원들은 사업을 추진할 때면 으레 책임지지 않을 궁리를 먼저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반대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교통신호 시스템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전자기술연구소가 교통신호에 대해 뭘 아느냐고 꼬집었다. 또 전산화 하려면 고급 기술이 필요한데 어떻게 국산 부품을 믿을 수 있냐고 따졌다.

당시 그들과 주고 받은 대화 일부를 소개한다. “교통신호는 불볕 더위와 엄동설한에도 견뎌야 하는 데 국산 기술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나는 “자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계와 기계 사이의 연결 케이블이나 컴퓨터 보드 같은 첨단 기술은 국산품을 쓰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국산품으로 실패해 문책을 받느니 차라리 안전하게 외제를 쓰겠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여러분이 안 된다는 품목은 전부 수입하겠다”고 말하자 그들은“그러면 하드웨어 거의 전부를 수입하는 꼴인데 그걸 두고 어떻게 국산화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되받았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몽땅 외제를 사지 왜 구차하게 일부를 쓴다는 거냐”고 몰아붙이는 이도 있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한 질문이다. 그러나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하자니 난감했다. 그런 질문은 정보 산업의 특징을 모르는 데서 나온 오해였기 때문이다.

어떤 작업을 전산화할 때 기계를 모두 외제로 쓴다 해도 하드웨어 값은 20%도 안 된다. 나머지 80%는 소프트웨어 값이다. 하드웨어를 100% 외국에서 사와도 소프트웨어를 우리 나라에서 만든다면 80%는 국산화한 셈이다.나는 이렇게 설명한 뒤 “하드웨어가 외제라 해서 전적으로 외제라 여기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소프트웨어는 국내 기술로 개발할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외국의 유명 컨설턴트와 협조해 최고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이러는 사이 절대 안 된다는 분위기는 한번 믿어보자는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김 부시장도 “우리 기술로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못하면 끝장이니 반드시 일을 성공시키리라 믿는다”며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이젠 시장을 만나 최종 결재를 받아낼 차례였다. 당시 구자춘 시장은 전산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나와 김 부시장에게 “자신 있나”라고 짧게 물었다. 그러자 김 부시장은 결단에 찬 목소리로 “자신 있다”고 답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렇게 해서 2년을 표류하던 전산화 사업의 주계약자는 78년 11월 말 전자기술연구소로 낙착됐다. 그러나 한 달도 안돼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전산화사업은 또 다시 6개월 가량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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