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어느 비가 내리는 가을 저녁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찾아온다. 문학도인 독고준과 정치학도인 김학. 둘은 진로소주를 마시며 학술동인지 ‘갇힌 세대’에 실린 독고준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혁명과 집단을 강조하며 동인회 ‘갇힌 세대’에 들어오라는 김학의 제의를 이땅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회의하고 ‘혁명은 언제나 최대의 예술이지만 그 예술이 불모의 예술인 것은 이미 실험이 끝난 것’이라며 시니컬하게 거절하는 독고준.남쪽도 북쪽도, 타락한 민주주의도 변질된 사회주의도 싫어 제3의 장소를 선택하지만 그곳 역시 광장일 수 없다는 절망에 1953년 바다에 몸을 던진 소설 ‘광장’ 주인공 이명준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는 남이면서 북이고자 했다. 자유(민주주의)이자 평등(사회주의)이고 싶어했다.
그러나 단단히 굳어져버린 이 땅의 이데올로기는 자유 없는 민주주의였고, 평등이 사라진 사회주의였다. 그 끔찍한 인간상실의 이념들, 오직 그 메말라 버린 이념의 잣대로만 인간을 구분 짓는 사회를 모두 체험한 그에게 선택은 곧 절망이었다.
독고준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고자 했다. 집단에 들어갈 경우 그 집단의 요구에 순응해야 하고,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집단의 이념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념의 속성상 ‘나의 것’이 아닌 것은 적(賊) 아니면, 흑(黑)으로 모는 독선에 빠지기에 그는 김학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갇힌 세대’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열린 인간이고 싶어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소외’였다.
소설가 최인훈은 그를 ‘회색인’(灰色人)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세상은 ‘속으로 번연히 쾌가 그른 줄 알면서 얼렁뚱당 거짓말이나 하는 유식한 분들이 정치를 하고 사업을 하고, 신문을 내고, 교육을 파는 판’이며 그 판은 설령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어져도 바뀌지 않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가난한 회색인은 그래서 애국자이길 거부했다.
40여년이 지나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독고준이 말한 ‘사랑과 시간’은 결코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의 우려대로 사랑은 자기 집단만을 위한 광적인 에고(ego)로 변질되고,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있다. 세상은 편가르기로 갈갈이 찢겨지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서슴없이 ‘칼의 노래’를 부른다. ‘개혁’에는 ‘복수의 피’ 가 어른거리고, ‘보수’에는 ‘탐욕’의 악취가 풍긴다. 그 피와 악취를 숨기기 위해 거침없이 민중과 조국을 팔지만 그들만을 위한 민중이고 조국일 뿐이다.
오직 적을 무너뜨리는데 혈안이 된 정치배들, 그들의 ‘주구(走狗)’로 진실을 팽개치고 과장과 궤변과 강변으로 춤추는 보수언론들과 시민을 자리를 떠나 정치집단이 된지 오래인 시민단체들. 그들에 의해 자유민주주의는 타락하고, 사회주의는 보편성과 순수성을 잃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역사ㆍ사회 바로세우기의 외침도, 보안법폐지에 반대하는 원로들의 걱정도 공허하다. 점점 광기를 띠는 그들의 집단 이데올로기가 역겹다.
불가에서 회색은 빛을 반사하는 백과 그 빛을 흡수하는 흑의 조화로 ‘중용’을 상징한다. 그 ‘회색’이 설 자리가 없는 곳. 집단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강요 당하는 숨막힐 듯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한 2004년의 한국에서 회색인들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이대현 문화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