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광 대국으로의 회귀올해 7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이렇게 공격했다. “독재자는 섹스 관광을 환영한다. 그(카스트로)가 한 말이다. ‘쿠바에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교육을 잘 받은 창녀들이 있다.’”
기자들이 물었다. 카스트로가 언제, 어디서 그 말을 했냐고. 부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장은 인터넷에 떠도는 대학생의 리포트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여기에도 출처가 없었다.
1992년 7월 카스트로는 실제로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에게, 외국인에게, 관광객에게 자신의 몸을 강제로 파는 여자는 없다. 몸을 스스로 파는 자들은 있다고 한다. 그들도 교육을 잘 받았고, 꽤 건강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에이즈 환자가 가장 적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랑한 것은 쿠바의 교육과 보건 설비의 우수성이었다.
실제로 2003년 정부지출의 9.1%가 교육에 할당되었다. 학급 당 평균 학생 수는 20명 미만이다. 1만6,000명의 예술 교사를 새로 훈련시켜 각급 학교로 파견했다. 병원의 보수와 대대적인 증축도 뒤따랐다. 혁명정부의 자랑거리인 셈이다.
아바나 어디에도 조직적인 매춘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트클럽이나 술집 주변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노리는 자발적인 매춘부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관광객은 쿠바 여성을 데리고 호텔로 들어가지 못한다. 보안요원이 막기 때문이다. 겨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개인 아파트나 숙소로 갈 수 있을 뿐이다.
관광산업은 쿠바경제의 젖줄이다. 해변, 음악, 구아바나 건물의 아름다움에 취한 관광객들이 즐겨 찾기 때문이다. 9ㆍ11 사태 이래 관광객의 감소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 나라는 작년부터 다시 찾아든 관광객으로 한 시름을 덜었다. 작년에는 190만 명의 관광객이 20억 달러를 뿌리고 갔다.
올해 목표치는 210만 명인데, 현재로는 낙관적이라고 한다. 여름 성수기인 8월 10일 하루에만 4만4, 415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일급 호텔에 투숙했다. 카리브 해의 쿠바는 다시 관광대국으로 회귀 중에 있다.
■ 개혁과 개방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의 경제지원이 끊어지면서 쿠바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1990년대는 쿠바혁명 이후 가장 어려운 암흑의 시기였다. 연간 20억 달러씩 들어오던 소련의 원조가 끊어졌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자동차도 사라졌다.
1993년 카스트로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선포했다. 농업 부문에 자유화 조치를 취했고 자영업을 허용했으며 달러 사용도 합법화했다.관광업과 광업 분야에 외국투자도 받아들였고 외부에서 수입을 하던 제품의 수입대체화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경제는 1990년대 말에 와서 호전되었고 지금은 그런대로 굴러간다. 하지만 아직도 1989년 이전의 생활수준에는 미달이다.
쿠바경제의 중추인 설탕산업의 위기는 심각하다. 올해만도 70개의 제당소를 폐쇄하고, 70개의 가동을 중지시켰다. 설탕의 국제 시세가 여전히 낮은 데다 설비의 노후화로 경쟁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50만 명을 고용하던 설탕산업은 50만 명을 내보내야 한다. 재교육과 실업수당으로 정리를 하고 있지만 쿠바 경제에 큰 걱정거리이다.
다행인 것은 수입대체 산업화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국내에서 시추한 석유로 전력의 자력 생산이 가능해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도 싼 값으로 석유를 보내고 있어 에너지 사정은 좀 나아졌다. 대금 중의 일부는 의료서비스와 연구원, 그리고 스포츠 감독 파견 등으로 털어낸다.
관광부문의 조달물자 70%를 이제는 국내에서 공급한다. 도시 유기농업의 성공으로 식탁에는 값비싼 채소와 과일도 자주 오른다. 정부가 선도적으로 지원해온 바이오기술 산업도 최근 들어 히트 상품을 쏙쏙 내고 있고, 의료기기 수출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지라 전통적인 설탕 수출국의 이미지는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는 2001년 이후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쿠바에 투자한 기업인에게 재산권은 물론 미국 입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헬름스-버튼법의 발효에 따른 외국인투자 감소가 그 한 요인이다. 그 결과 2003년에 들어와서 외국인 합작회사의 숫자도 15%나 감소하게 되었다.
올해 들어 마이애미 거주자들의 쿠바 송금이 금지되면서 외환소득은 그만큼 줄어들 예정이다. 2003년 중국-쿠바 우호협력 협정이 발효되어 중국의 투자와 단체 관광객들이 쇄도하면 부족분이 상쇄될 전망이다.
외국인 관광객의 증가와 광업의 호황 등으로 올해는 GDP가 3% 정도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02년의 1.5%, 2003년의 2.6%의 성장률에 뒤이은 회복세로 실업률도 2.3%로 다시 낮아졌다.
■ 이중경제 구조
개혁과 개방 이후 경제는 그런대로 굴러가지만 병리현상도 없지 않다. 달러 경제권(관광 부문)과 페소 경제권으로 분리된 이중경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취약계층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독거노인들은 배급표로 15일간 식량은 구할 수 있지만 저축이나 연금소득이 없으면 생계유지가 어렵다. 지리적으로는 동부 쪽에 취약인구가 많고 흑백 문제도 다시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한다. 실제로 필자도 관광업 분야에서 흑인이나 물라토(중남미 지역의 백인과 흑인 혼혈아)를 거의 보지 못했다.
소득 배분의 격차도 생겼다. 1998년 국가 부문의 임금소득자가 94%였지만 2004년 현재 20~25% 정도 줄었다. 국가 고용자의 소득은 계속 정체된 반면 관광업이나 자영업, 그리고 지하경제에 종사하는 가족의 소득은 4배 가량 상승했다. 이제 외국합자회사의 경영인, 개인 식당과 숙소 주인, 국영기업 관리인 등은 새로운 계급으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당국은 양극화를 막기 위해 부패척결과 고율의 세금 징수로 대응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쿠바도 결국은 중국의 경험을 본떠 시장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성형(중남미 전문가)
협찬:삼성전자
■유기농 협동농장 관리인 미겔 살시네스 로페스
미겔 살시네스 로페스(55)는 아바나 외곽에 있는 비베로 알라마르 협동농장의 관리인이다. 유기농의 성공 사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이 농장에는 일본, 북유럽, 캐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농장의 인원은 60여명, 규모는 3.4 헥타르에 불과하지만, 다품종 소량 생산방식으로 다양한 야채와 작물을 재배한다. 다품종은 병충해를 막고, 땅의 비옥도를 관리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살시네스는 귀띔을 한다. 한쪽에는 지렁이를 이용한 유기질 비료를 채로 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농장의 역사를 듣고 싶다.
“나는 농림부 관개국에 근무했던 관리였다. 당국에서 협동농장에 시장 개념을 도입하는 실험을 하는 데 자원할 사람을 찾기에 내가 나섰다.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고 놀렸다.3남1녀의 가장인데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황무지에다 농장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돈도 한 푼 없었다. 3개월간 월급을 계속 받는다는 조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한 시기였기에 생산만 하면 팔 수 있었고, 조금씩 규모를 늘려 나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농장이 크지 않다. 유기농은 어떻게 해서 도입됐는가.
“유기농 농장은 크면 안된다. 다품종 소량생산에 맞다. 하지만 상추나 토마토는 값이 좋다. 유기농이 시작된 까닭은 구동구권에서 들어오던 화학비료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필요의 산물이다.”
-농장은 어떻게 운영하나.
“60여명의 일꾼들이 평균 주당 41시간을 일한다. 자발적인 노동도 한다. 60세 이상의 일꾼도 16명이나 된다. 80세인 알베르토는 농장 최고의 일꾼이다. 젊은이들은 기술직을 선호하기 때문에 벌이가 좋아도 농사일은 하지 않는다. 생산물 가운데 일부는 2개의 학교와 탁아소에 싸게 공급하고, 나머지는 내다 판다. 상반기의 수익으로 140만 페소를 올렸는데, 이 중 기여도에 따라 이익금을 배분한다. 농장 일꾼들은 평균 800 페소를 받습니다. 의사나 장관들이 받는 400 페소의 두 배에 해당하는 임금이다.”
-미래 계획은.
“유럽에서 유기농 쌀, 사탕수수, 시트론을 수입할 의향이 있어 이를 생산할까 고려하고 있다. 자본 부족을 극복하는 신용제도가 있다면 농장의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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