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으로 서울시 교통신호 전산화를 이뤄내겠다는 김명년 부시장과의 약속은 시작에 불과했다. 부시장과 의기투합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이 사업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무진 설득은 물론 실현 가능 여부에 관한 검토 등 갈 길은 멀기만 했다.나는 우선 지멘스와 필립스 등 외국의 6개 회사가 제출한 입찰 제안서를 꼼꼼히 따져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 사업에 대해 먼저 100% 이해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사실 서울시도 입찰 제안서를 받아보고 서울대 생산기술연구소에 업체 선정 용역을 의뢰하는 등 나름대로 애는 썼다. 그런데 1978년 당시만 해도 국내 최고라는 이 대학에 컴퓨터나 전자공학에 능통한 교수 또는 연구원이 드물었다. 불과 26년 전의 일이지만 그게 우리나라 정보기술(IT)의 현실이었다. 서울대가 내놓은 결론은 각 업체가 제시한 자료를 근거로 단순 수치를 비교, 지멘스와 일본의 교상(京三)이 나을 것 같다는 정도였다.
서울시는 두 회사의 담당자를 불러 “전산화하면 신호등은 어떻게 변하게 되느냐”고 질문을 했지만 내용을 명쾌하게 이해를 하지 못해 사업이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김 부시장에게 큰 소리는 쳤지만 은근히 걱정이 됐다. 나는 그때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컴퓨터 개발 담당 부소장이었다. 말이 부소장이지 정부의 인식 부족으로 내 밑에는 고작 10명의 젊은 엔지니어밖에 없었다. 그들은 교통신호 전산화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경험이 짧았다. 그럴수록 반드시 해내겠다는 오기와 도전 정신이 꿈틀 댔다.
나는 우선 이들 엔지니어를 가르치면서 전산화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갈 리더를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때마침 서강대 물리학과의 박병소 교수가 찾아왔다. 서울대 물리학과(52학번) 1년 후배인 그는 디지털을 포함한 전자회로와 컴퓨터 하드웨어에 관한 한 당시 국내 최고의 기술과 지식을 자랑했다.
그는 “1년간 안식년을 갖게 됐는데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가고 싶다”며 내게 추천할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에서 논문을 쓰고 견문도 넓히겠다는 박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그가 적임자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그는 처음에는 한사코 사양하다 나라를 위해 매우 유익한 사업이라는 나의‘강권’에 못 이긴 듯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는 비교적 순탄했다. 박 교수는 불과 보름 만에 6개 회사의 제안서를 파악한 뒤 나름대로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매우 전문적이라 자세히 설명하자만 지면이 턱없이 부족할 듯 싶다. 간단히 말해 6개 회사는 모두 트랜지스터 등으로 이뤄진 하드웨어 로직을 사용했지만 박 교수는 이 같은 방식은 이미 낡은 만큼 소프트웨어 로직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왕 현대화하려면 가장 최신 기술로 국산화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를 토대로 ‘교통신호 시스템 국산화 계획서’를 작성한 뒤 78년 11월 김 부시장과 실무진을 만났다. 예상대로 실무진은 이런 저런 핑계와 함께 온갖 꼬투리를 잡으며 미적대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자 김 부시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이 박사의 제안대로 일을 추진하자”고 결단을 내렸다. 실무진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많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