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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가을/13만년前 화산이 내뿜은 초록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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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가을/13만년前 화산이 내뿜은 초록물결

입력
2004.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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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섬 제주가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가을의 색조와 정념(pathos)이 조용히 스며드는 제주의 산하. 짙푸른 바다도 좋지만 역시 제주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선 한라산 자락이 꿈틀대는 내륙을 봐야 한다. 원시의 비경을 간직한 제주의 속살을 찾아 떠났다.

거대한 폭발의 흔적

산굼부리넓고 깊은 신비의 화구, 끝없이 펼쳐진 평원.

한라산 동쪽 자락의 ‘산굼부리’는 거대한 화산 분화구다. 대부분의 오름은 저마다 굼부리를 가지고 있다. 이 굼부리는 아득한 옛날 두꺼운 지각을 뚫고 나온 대지의 숨구멍들이다. 일반적으로 분화구가 봉우리 위에 놓여진 것과 달리 산굼부리는 들판 한가운데서 푹 꺼진 특이한 형태다. 화산이 폭발할 때 가스만 터져 나오고 용암 등 다른 물질을 포함하지 않아 낮은 언덕만 형성한 것. 이를 마르(Maar)형 화구라 하는데 국내에서는 산굼부리가 유일하다. 헛 가스만 뿜어낸 분화구라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분화구의 지름과 깊이는 한라산 백록담보다 크고 깊다. 폭발 이후 13만년의 시간, 거대한 구멍안은 인간의 범접을 막은 채 천연의 모습 그대로 숲을 이루고 있다.

분화구 언덕에 서면 눈 앞으로 한라산의 우람한 산세와 함께 광활히 펼쳐진 초원이 녹색의 향연을 펼친다. 밭과 목장을 경계 지어 심은 삼나무들이 열지어 선 품이 유럽 고성의 정원을 옮겨다 놓은 듯 하다. 굼부리의 테두리, 낮은 언덕엔 들풀이 지천이다. 억새의 섬 제주에서도 억새가 가장 아름답다는 명소가 바로 이 곳. 간간히 먼저 꽃 피운 억새들이 하늘거리며 만추(晩秋)의 은빛 장관을 기대케 한다.

붉은 보라빛 꽃향유가 뒤덮은 풀밭 위에선 모처럼 물건너 여행온 10여명의 40대 주부들이 가을 꽃구경에 함뿍 빠져있다. 사진 찍던 신혼부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좋겠다. 신랑 좀 빌려달라”며 걸쭉한 농을 건넬 때는 영낙없는 아줌마들이다. 하지만 금새 풀밭에 뒹굴며 턱을 괴고는 깔깔댄다. 웃음 소리는 갈라지고 탁해졌지만 검은 눈망울의 풋풋함은 수학여행길의 여고생 시절 그대로다.

신령스런 숲 비자림

제주의 도로 중 아름답지 않은 길이 없지만 산굼부리를 지나는 1112번 도로는 그 중 빼어난 도로다. 건설교통부가 2002년 제1회 아름다운 도로 대상으로 선정한 공인된 도로이기도 하다.억새와 오름과 어우러진 삼나무 가로수길. 최고의 운치를 자랑하는 이 도로를 타고 동쪽 바다로 향하다 보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림을 만날 수 있다.

오름이 봉긋 솟은 초원지대에 자리한 비자림은 13만5,000평 규모로 300~800년된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모여있다. 단일 수종이 이룬 숲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입장권을 끊고 잠시 오르자 포장된 길이 끝나며 검붉은 화산토의 산책로가 시작됐다. 마른 비자잎이 곱게 깔려 절로 맨발로 걷고 싶어지는 길이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사방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부드럽게 굴곡지고 희뿌연, 독특한 생김새의 비자나무 줄기 위로 녹색 덩굴이 타 오르고 고운 이끼가 내려앉아있다. 때맞춰 이슬비가 내렸다. 음습한 숲에 퍼지는 아득한 생명의 빛. 숲은 생명의 정원이다. 온몸으로 원시의 날내음이 물씬 적셔온다.산책로의 가장 안쪽에는 이 숲에 처음 비자를 뿌리내린 800년 수령의 조상목 ‘새천년 비자나무’가 있다. 둥치 둘레가 어른 서너명은 족히 양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굵기다. 지역의 무사안녕을 위해서라는 이름 붙여졌다는데 그 명명 경위가 나무를 둘러싼 철제 울타리 만큼이나 촌스럽고 어색하지만 수십갈래 가지를 퍼뜨려 위엄을 갖춘 품이 신령스럽다. 내려오는 산책로는 이끼가 내려앉은 돌담과 어울려 또 다른 느낌이다. 숲이 뿜는 초록에 돌담도 물이 들었나 보다.

비자림 주변에는 제주도의 오름 중에 자태가 곱기로 유명한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있다.

북제주=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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