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사회에서 친일파 논쟁과 박정희 논쟁이 한창입니다. 필자가 대학 1학년 때 운동권에서 받던 시각교정용 세미나의 주제가 이런 것들이었던 것임을 회상할 때 역사가 마치 30년전으로 되돌아 간 느낌입니다.당시의 훈련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던지 교수가 된 이후에도 5ㆍ16군사혁명이란 말 대신 군사쿠테타라는 말을 잊지 않고 어디선가 썼다가 그런 표현은 학생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회현상은 긍정,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기 마련인데 국내에서는 부정적 측면 위주로, 해외에서는 긍적적 측면 위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말레이시아 등 많은 개도국들이 한국의 국가주도 고도성장을 자국의 발전모델로 삼아 잘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 큰 아이러니는 박정희 모델이 박정희의 라이벌 김일성과 그 아들이 통치하는 북한에서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죠.
북한은 1990년대 중반이후 수출과 외국인투자를 성장의 엔진으로 하는 대외지향적인 발전전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량 및 소비재 부문에서의 자발적인 시장화가 허용되고 있음에도불구하고 국유부문에서는 어떠한 급진적인 개혁을 시작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죠.
이러한 이행전략은 북한식 ‘동아시아 발전모델’ 즉, 박정희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외지향적 발전 전략과 시장화된 소비재 부문, 그리고 생산재 부문에 대한 통제라는 요소가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의미를 현재 중국이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이해할 때, 북한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도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중국이 78년에 개혁개방을 천명한 이후, 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걸기까지 14년이 걸렸죠.
현재 북한은 대내적으로는 소규모 사적경제를 허용하여 당장 급한 생계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고, 정책의 중점은 대외개방(외자도입과 수출을 통한 외화획득)에 두어 주요 경제부문의 회생을 도모하는,한마디로 ‘사회주의 개방경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방정책의 주 장애물은 미국에 의해 부과된 경제제재와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인 교착상태이죠. 비록 미국의 경제제재 하에서도 일정한 성공을 거둔 베트남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수출시장이나 투자자본의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데 미국시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죠.
미국의 입장은 북한이 국제적인 신용과 자본에 접근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미국이 북한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것인가에 있어서 한국의 역할 또한 큽니다.한국정부와 사업가들의 태도와 행동은 중요한 신호 역할을 하는 것이죠.
상황의 변화로 대외개방 위주의 사회주의 개방경제, 또는 북한식 박정희 개발독재 모델이 한국과 국제사회의 협조로 일정한 성공을 거둘 경우, 그 때가서는 미뤄왔던 대내 경제체제 개혁이 빠른 템포로 진행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78년에서 84년까지의 농촌개혁이 성공하자, 중국이 84년 10월 당대회에서 도시로의 개혁 확대를 자신있게 선포한 것에 유추할 수 있죠. 북한은 규모가 작고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대내개혁의 속도가 일단 착수된 이후에는 중국보다 더 빠를 가능성이 크죠. 이러한 예상은 북한의 내적동질성, 북한이나 남한 정부의 강력한 행정 능력, 남한의 자본력, 그리고다른 이행국가들에 대한 추격 의식 등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근/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