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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2>신호등체계 전산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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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IT계의 선구자 이용태 <2>신호등체계 전산화 성공

입력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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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신호에 한번도 걸리지 않다니 정말 신기하네요.”서울시 교통신호 전산화 시스템이 완성된 1980년 8월 1일은 땡볕이 무척 따가웠다. 전자기술연구소 부 소장으로 전산화 작업을 진두지휘한 나는 김명년 당시 부시장을 승용차에 태우고 청량리를 향해 종로 화신백화점 앞을 출발했다. 화신 앞에서 청량리까지 가려면 교차로 10개를 지나야 했는데 전산화 되기 전만 해도 7개 정도의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를 만나는 게 보통이었다. 정지 시간은 대략 30초였다. 그런데 이날은 한번도 빨간 신호에 걸리지 않고 논스톱으로 달렸다.

김 부시장은 “교통 전산화를 이뤄내다니…”라고 감격에 겨운 듯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도 “이제 시작이지요. 삼천리 방방곡곡에 하루빨리 이 시스템을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이론에 매달려온 내가 상업용 연구에 성공한 건 이 때가 처음이다. 1932년 8월 18일생이니 마흔 여덟을 넘긴 나이였다. 이처럼 나의 첫 ‘작품’은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컴퓨터가 아니라‘교통신호’였다.

김 부시장과 내가 황홀함 속에 샴페인을 터뜨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서울시가 교통신호를 전산화하기 위해 예산을 편성한 76년 말 이후 3년8개월 동안 우리 앞에는 온갖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장 경질에 따른 사업 중단 위기 등 숱한 악전고투 끝에 이뤄낸 쾌거였기에 그날의 감격은 더욱 컸다.

서울시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74년 8월 15일 무렵부터 교통신호 전산화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구자춘 시장이 선진국을 둘러보고 우리나라도 전자 감응으로 신호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자 시는 서둘러 77년도 예산에 이 사업을 반영했다.

그때만 해도 서울시의 교통 신호등은 미국에서 수입한 기계식이었다. 전기모터를 돌려서 회전하는 수에 따라 시간을 계산, 일정 시간이 흐르면 무조건 신호를 바꾸는 방식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에도 신호등이 깜빡거리자 교통 순경이 전기를 아낀다며 일일이 등을 끄러 다니던 시절이다.

78년 6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서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내가 교통신호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김 부시장 때문이다. 건설국장을 거쳐 78년 10월 제2부시장이 된 그는 사적인 모임에서 교통신호 전산화와 관련된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하철건설본부장시절 기계식 신호 체계를 자동식으로 바꾼 경험이 있는 그는 내게 교통신호 개선 사업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주었다.

사연인즉 이랬다. 서울시는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76년 가을 외국 기업을 상대로 공개 입찰에 나섰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컴퓨터 자동 감응 장치를 국내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멘스와 필립스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입찰 제안서를 냈다. 그런데 서울시에는 기술적인 면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 입찰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쩔쩔 맸다. 특히 컴퓨터에 관한 이해와 지식은 요즘의 ‘컴맹’ 수준도 밑돌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자칫 해를 넘기면 예산 집행 자체가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책임지고 우리 기술로 교통신호 전산화를 이뤄내겠습니다”라고 호탕하게 말했다. 김 부시장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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