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때문에 한창 시끄러웠습니다. 여당과 재경부, 한국은행 모두 “나중에 논의하자”고 해서 수면 아래로 잠복했습니다만,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사안입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표현하는 조치를 말합니다. 사전적으로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의되지만, 경제현실에서는 대혁명입니다.
- 100분의1 리디노미네이션이 되면
A씨는 8원짜리 패스를 사서 출근 전철에 올랐습니다. 회사 앞에서 35원짜리 스타벅스와 20원짜리 담배 한갑을 샀죠. 마침 월급날이라 예금계좌를 조회해보니, 3만원이 입금돼 있었습니다. 퇴근길에는 6살짜리 아들에게 주려고 유명 메이커의 두발 자전거를 1,200원에 샀습니다. 지난주에 1억원 짜리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한 공로로 회사에서 1만원의 포상금을 받았기 때문이죠.
소설속에서나 나올법한 얘기 같지만, 한은이 하자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100분의1로 액면절하했기 때문에 8원짜리 패스는 사실 800원이고, 월급 3만원은 300만원입니다. 리디노미네이션 후 8원으로 여전히 기존 800원짜리 전철을 탈 수 있기 때문에 실질가치는 변동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실물경제에서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죠.
나이 드신 분들은 1953년, 1962년 화폐개혁을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처럼 예금을 동결해버린다거나, 숨은 돈이 드러날 경우 세무추적에 들어간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일단 한은이 주장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예금 동결없이 무제한적으로 신ㆍ구 화폐를 교환해주는 방식입니다.
- 왜 리디노미네이션인가
첫째, 국민들의 일상거래나 회계장부 처리를 편리하게 하자는 겁니다. 한마디로 물건가격과 장부에서 ‘0’을 줄이자는 겁니다. 웬만한 가전제품 가격표를 읽는 데만 한참이 걸리지 않습니까. 조만간 통계에 1조(兆)원의 1만배인 1경(京)원이 등장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0’이 무려 16개 입니다.
둘째, 우리나라 돈의 대외 위상을 높이자는 이유도 있습니다. 환전할 때 원화를 한아름 들고 가도 손에 쥐는 달러는 얼마 안됩니다. 만일 1달러=1.2원이라면 원화의 싸구려 이미지는 단번에 벗을 수 있겠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달러에 대한 환율이 네 자리인 나라는 한국, 터키뿐입니다.
세째, 장롱 속 묻혀있는 자금의 양성화 효과도 있습니다. 1962년 화폐개혁이 바로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더불어 위조지폐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테고, 10만원권 수표발행이 필요 없기 때문에 연간 6,000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인플레가 워낙 심한 나라라면 인플레 기대심리를 낮출 수 있습니다. 살인적 인플레로 터키는 지하철 패스 한장이 100만리라(약 800원)입니다. 내년부터 100만분의1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는데, 이 경우 패스는 1리라가 됩니다. 국민들의 물가불안 심리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겠죠.
- 리디노미네이션의 부작용
리디노미네이션은 그러나 엄청난 유ㆍ무형의 비용이 듭니다. 우선 새 화폐를 찍어 구 화폐를 바꿔주는데 막대한 돈이 들겠죠. 현금지급기나 자동판매기도 변경해야 하고 가격표, 월급명세서는 물론 회계장부도 새로 바꿔야 합니다. 일반회사나 금융기관, 공공기관의 각종 전산처리 소프트웨어도 바꿔야 합니다. 소위 돈이 표기되는 모든 것을 바꿔야 합니다.
무형의 비용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격표를 바꾸는 과정에서 인플레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100분의1 리디노미네이션을 한다면 560원짜리 물건을 5원60전을 팔아야 하는데, 끝자리를 올려 6원에 팔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물건이 싸졌다는 착각에 과소비와 인플레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1원을 과거 1원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죠.
무엇보다 국민들의 불안심리입니다. 장롱 속의 돈이 경제활동에 투입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화폐교환 과정에서의 개인정보 노출과 세무조사 우려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자칫 부유층의 부동산ㆍ골동품 등 실물자산 투기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은 물가도 안정되고, 경기도 괜찮고, 정치ㆍ사회적으로도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을 때 해야 한다는 견해가 중론입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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