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문화방송(MBC)이 나의 고향(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 풍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기자가 우리 아이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우리 아이는 “부친은 300년을 사신 분이다. 18세기식 유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지금은 21세기 최첨단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니까”라고 말했다.한번은 친구인 서정수 한양대 명예교수가 나의 평전을 쓰고 싶다고 했다.나는 그 만한 가치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원래 물리학자인 이 박사는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이라는 색다른 직함을 갖고 있다. 칠언율시(七言律詩ㆍ한시의 한 격식)에 도통했고 절과 정자의 현판을 써주는 걸 보면 영락없는 옛 선비다. 그런데 삼보컴퓨터를 설립, 한국 최초로 컴퓨터 사업에 손을 댔다. 데이콤으로 디지털 통신을, 두루넷으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1세기 지식산업의 최첨단을 걸은 셈이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이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이 박사의 생애를 통해 우리 세대가 대 변혁기를 어떻게 살았는지 후배들에게 전해줄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니 나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왔다. 1930년대에 태어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그러하듯 말이다. 어릴 적에는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시민의 수모를 당했고, 해방이 되자 좌우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동포끼리 서로 싸우는 혼돈을 경험했다. 한국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와 참상을 겪었다. 또 60~8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국가 발전의 주역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고 이제는 지식 정보화 시대를 맞게 됐다.
내 일생의 풍파를 상징하는 한 예로 교육과정을 돌아보자. 선비인 우리 할아버지는 학교에 다니면 ‘일본놈’이 된다는 이유로 신식 교육을 거부한 채 내게 한학을 가르쳤다. 그나마 아버지가 우겨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 갔지만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결국 4학년 때 중퇴했다. 해방 후엔 안동중학교에 입학했는데 2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좌우 대립에 휩싸여 마음 놓고 공부할 처지가 아니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어수선한 학교보다는 독학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7년 4월 대입 검정고시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도서관에서 몇 년을 보냈다. 전쟁이 터지자 시골 고등학교(영덕농고)의 졸업장을 따낸 뒤 52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그 시절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바람에 캠퍼스에서 강의를 들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부실하게 학교 생활을 한 나는 66년 4월 서른 넷의 늦은 나이로 미국의 유타대로 유학간 다음에야 비로소 학생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다양한 교사 경험도 쌓았다. 전쟁 통에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2년 가까이 담임을 맡았다. 대학생이 된 뒤 처음에는 가정교사를 했고 서울대가 부산에서 환도한 후에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전임교사를 지냈다. 밤에는 학원에서 가르쳤다.그런가 하면 이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도 강의 했다. 유치원 선생 빼고는 모든 종류의 교직을 두루 거친 셈이다. 원래 남을 가르치는 게 천직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나는 언젠가 후손을 위해 인생 역정을 적어 놓아야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농경사회에서 공업화와 정보화 사회로 빠르게 변해갔는지를 일러주고 싶었다. 둘째는 파란 많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경험한 일들이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이 작업은 마땅한 계기가 없어 미루어 왔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글을 써보라고 하기에 선뜻 받아들였다. 변변치 않은 나의 인생 이야기가 얼마나 독자들에게 뜻 있는 일이 될지 걱정이 앞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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