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시대의 철학지오반나 보라도리 지음·손철성 등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1만5,000원
20세기를 ‘전쟁과 광기의 세기’라고 부른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유럽과 미국, 나아가 세계 전체를 격동으로 몰고 간 1차 대전과 2차 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하지만 나치의 대학살, 식민주의와 전체주의의 폭력, 그리고 냉전의 포위에서 막 벗어난 21세기의 문턱에서 세계인들은 ‘9ㆍ11’로 상징되는 새로운 공포에 직면하고 있다. ‘테러’는 늘 역사 속에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가장 위력적이고 세계화한 형태로 지금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떨기 전에 우리는 9ㆍ11을, 테러를 어떤 식으로든 정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9ㆍ11이라고 말하거나 명명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거나 명명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이 일리 있기도 하거니와, 그래야만 테러에 어떻게 대처할지, 테러의 세기를 넘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의 바사르 대학 철학과 지오반나 보라도리 교수가 ‘9ㆍ11’을 주제로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인터뷰하고, 그들의 대답을 다시 설명해 엮은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두 철학자는 유명세도 유명세지만, 저자에 따르면 둘은 ‘철학에 종사함으로써 자동으로 당시의 시대를 고려하려고 노력’하는 ‘홀로코스트 이후 철학자’이기 때문에 인터뷰 대상이 되었다.
2001년 말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두 철학자는 9ㆍ11과 그 이후 지금까지 2,900여 건에 이르는 테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또 문명사적으로 진단한다. 테러를 정치ㆍ경제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분석하는 경우는 많지만, 거기에서 철학적인 의미를 끌어내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테러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아랍세계는 급속한 근대화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이 완전히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실제로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랍세계는 서양 전체를 자신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버마스는 9ㆍ11 테러리스트들의 분명한 이데올로기가 철학적 전통을 지닌 계몽주의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 근대성이나 세속화를 거부하는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근본주의적 성향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병리학’이라고 명명하는‘폭력’에 의해 매개되어 테러로 나타난다. 왜곡된 의사소통이 악순환하면서 상호불신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종국에 의사소통이 단절된다.그리고 대화가 끊어진 바로 그 지점에서 폭력이 생겨나고,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된다고 하버마스는 설명한다. 그리고 적확하게도 세계화 때문에 발생한 의사소통적 불안정의 원인은 헌팅턴이 주장한 것처럼 문화적인 것이아니라, 바로 경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리다는 이런 사회적 매커니즘에 동의하면서도 테러리즘은 근대성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근대성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특유의 개념놀이를 통해 테러의 세계화를 ‘자가면역’의 무질서증상이 확대된 것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유기체를 보호해야 할 방어기제가 자살한다는 의미이며, 9ㆍ11 테러리스트들이 자신의 목숨을 던졌을 뿐 아니라, 표적인 미국의 과학기술과 사회시스템을 십분 활용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테러를 극복할 것인가
하버마스에게 해답은 ‘이성’이다. 이성이야말로 투명하고 조작되지 않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이며, 궁극에는 근본주의나 테러리즘과 같은 근대화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이다. 그리고 그는 윤리와 법의 전선에서 ‘관용’을 지지한다. 입헌민주주의는강제가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합리적인 합의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상황이며, 거기에 관용이 더불어 실행될 때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는 다소 비관적이다. 그는 이러한 파괴적 긴장들은 감지되고 명명될수 있을 뿐, 완전히 통제되거나 제거될 수 없다고 본다. ‘관용의 문턱’이라는 말처럼 ‘관용’ 자체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고 보고, 오히려 ‘환대’라는 다른 태도를 더욱 강조한다.
철학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타계해나가는 데에는 견해의 차이가 뚜렷하지만, 현실정치의 해결책에서는 두 사람이 그리 차별이 없다. 데리다는 ‘전선이 흔히들 그리는 것처럼 동양 대 서양 사이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전선은 오히려 미국과 유럽 사이에 있다.
하지만 그 유럽은 지금의 유럽은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유럽 또는 도래할 유럽이다. 그것은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2003년에 공동으로 발표한 선언문에서 그려낸 ‘평화적이고, 협력적이고, 타문화 및 대화에 개방되어 있는 유럽의 상’일 것이다.
짐작컨대 전세계가 테러에 무차별로 포위되어 갈수록, 전선이 아시아 등등으로 넓어질수록, 해당지역에서는 테러를 극복하기 위해 언제나 새로운 공동체 상이 요청될 것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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