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홀린 광대정영문 지음
문학동네 발행·8,500원
소설가 정영문의 연작 소설집 제목 ‘달에 홀린 광대’는 무조(無調)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가 1912년에 작곡한 동명의 작품에서 빌어온 것이다.
이 곡은 벨기에인 알베르 지로가 쓴 동명의 초현실주의 시에서 작곡가가 일부를 취해 곡을 붙인 것이라는데, 곡의 초연 팸플릿에는 ‘진정한 시는 우화적인 전체적 의미와 음악처럼 간접적 효과밖에는 없다’는 말이 실렸다고 한다. 3부로 이뤄진, 몽환적인 이 곡은 풍자적이고 빈정거리는 투이며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유머로 장식돼 있다(라루스 세계음악대백과사전).
쇤베르크에게 조성이 답답한 틀이었다면, 정영문에게는 ‘소설’이라고 부르는 형식의 문법이 숨을 틀어막는 껍데기다. 그걸 깨뜨리려니 천상 언어, 즉 말과 글을 걸고 넘어져야 했고 통상 느낌이라고 부르는 감성이며 이성의 영역에 들 법한 생각까지도 미심쩍어졌던 것이다.
해서, 그는 소설 안팎에서 끊임없이 회의(懷疑)한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니? 그에게 언어란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장난감’일 뿐이다. 나뭇잎 몇 개 떨어져 있을 뿐인 휑한 절 마당을 쓸고 있는 중을 두고 소설 속 주인공은 생각한다. ‘그는 건성으로 마당을 쓸고 있는 것 같았다.
괜히 마당을 쓸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괜히 마당을 쓰는 일은 괜한 짓이지. 괜한 짓은 괜한 짓일 뿐이지. 하긴 괜한 짓은 괜히 하게 되지. 괜히 해야만 괜한 짓이 되지. 그렇게 생각하자 중이 마당을 쓰는 일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장난’을 따라가다 보면 첫 진술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예사고, 아예 뭐였는지 까마득해지기도 한다. 하긴 그의 소설에서 첫 머리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나의 얘기, 나의 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얘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도…끝내도 좋은 얘기이다. 거기에 나의 얘기의, 내가 나의 얘기라고 생각하는 얘기의, 그리고 지금부터 나의 얘기로 만들 생각인 얘기의 특징이 있다’
일전에 그는 한 칼럼에서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밑천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형식 실험 또한 막다른 골목에 와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장래 인류 최대의 화두는 ‘오락(쾌락)’이며, 문화의 가치기준 역시 사유가 아닌 ‘감각’이 될 듯 한데, 소설이 설 마땅한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굳이 찾자면 미래 인류의 인간에 대한 관심 혹은 의식을 점검하는 영역쯤일 텐데, 그 자리가 비록 옹색하지만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자리이다. 이 난감한 숙제 앞에 그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고독하다.
끝으로 한가지, 이번 소설은 술술 쉽게 읽힌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다르다. 탄탄한 문장으로 거침없이 이어가는 예의 ‘말장난(혹은 그로테스크한 유머)’이 풍성하게 배치된 까닭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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