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추정되는, 한국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정체불명의 지역에 동양인들이 조용히 스며드는 호텔이 있다. ‘호텔 비너스’. 그러나 이름이 무색하게도 투숙객들의 삶은 아름답거나 풍요로워 보이지 않는다. 빔 벤더스 감독의 ‘밀리언 달러 호텔’(2000년)이 무일푼 부랑자들의 집결지였던 것처럼.치유되기 힘든 가슴앓이를 각자의 방에 숨긴 채 장기체류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조차 외면한다. 한때 잘 나갔던 의사는 ‘닥터’, 그의 아내는 ‘와이프’, 말이 없는 소녀는 ‘사이’라고 불리 울 뿐이다. 그저 “비너스의 뒷모습을 보여주세요”라는 말로 투숙을 선언하면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거리를 둔 채 친분을 쌓는다.
초난(쿠사나기 츠요시)은 그들 사이에서 이름을 잃지 않고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관계복원을 돕는다. 모노 톤으로 촬영한 흑백화면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절망과 고독에 몸부림 칠 때, 초난은 그들을 위해 밝은 색깔의 희망을 만들어간다. ‘호텔 비너스’는 쿠사나기 츠요시에 의한, 쿠사나기 츠요시를 위한 영화다. 그는 초난강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코믹하게 각인되어 있지만, 일본에서는 부드럽고 조용한 만능 엔터테이너의 이미지가 강하다. 두 국가에서 각기 다른 두 얼굴로 자리잡은 그는 이 영화에서 초난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쿠사나기 츠요시의 본래 모습을 보여준다.
’호텔 비너스’는 TV연출자 출신인 다카하타 히데타 감독의 일본영화이지만 출연자들의 모든 대사가 한국어로 처리된 점이 이색적이다. 수채화 같이 깔끔한 화면, 짧은 탭 댄스로 장면과 감정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영화적 장치가 눈길을 잡는다. 그러나 강약 없이 이어지는 CF같은 화면과 음악의 부조화가 시간이 갈수록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대사가 일본배우들의 동작과 섞이지 못해 겉도는 장면들은 적잖이 당혹스럽다. 등장인물의 심리에 빠져들려는 찰나, 각성제처럼 툭 던져지는 타국 배우들의 서투른 대사가 주는 이질감은 한국관객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힘든 벽으로 느껴질 것이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국적 배경과 언어가 매력으로 통했는지 9억엔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2004년 모스크바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이다. 10일 개봉. 12세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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