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과 영주는 공통점이 많다. 양반, 선비의 고장이다. 마을에 들면곳곳에 자리잡은 서원, 사찰, 고택들이 나그네를 압도한다. 퇴계 이황, 의상대사, 서애 류성룡 등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곳들이다. 이 지역에 와 처음 받는 느낌은 바늘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깐깐함이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해학과 풍자가 가득하다. 어려운 현실조차 유머로 승화시키는 여유가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어려운 경제상황, 이 속에서 안동과 영주를 찾은 까닭이다. 고단한 삶을 재치있게 헤쳐나간 그들만의 여유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우선 안동 하회마을에 들어섰다. 수많은 민속마을 중 가장 이름난 곳이다. 마을 옆으로 물(河)이 굽이치면서(回) 태극모양을 만들어냈다. 마을의 모습은 물위에 뜬 연꽃을 닮았다. 전형적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지형이다. 하회마을 건너편의 부용대에 오르면 이런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들이 600년간 살아온 집성촌이다. 징비록(懲毖錄)의저자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곳이다. 양진당, 북촌댁을 비롯한 130여채의 고택에는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하회탈춤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탈춤의 주인은 류씨가 아니라 김해 허씨이다. 류씨보다 200년 앞서 이 곳에 터를 잡고 탈춤을 전승해왔다. 신의 노여움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빈다는 내용의 하회탈춤은 양반에 대한 질펀한 풍자가 압권. 하지만 탈춤이 지금까지 번성할 수 있었던것은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풍산 류씨의 재정지원 덕분이었다.
‘신들에게 욕을 많이 먹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논리가 담겨있지만, 전도된 세상을 통해 춤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준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내달 1일부터 10일까지 하회마을과 안동일대에서는 그들의 신명나는 춤판을 만끽할 수 있는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이 열린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낙동강줄기를 따라 4㎞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시대 세워진 수많은 서원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명성으로 따지자면1,000원짜리 지폐의 뒷면을 장식한 도산서원이 단연 앞서지만 건물의 운치와 주변 경관은 병산서원을 따라갈 수 없다.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면 만대루와 만난다. 가로로 길게 뻗은 23m길이의 누각이 압권이다. 누각에 오르면 낙동강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병산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 곳에서 만난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이 맛깔스럽다. 누각은 글읽기에 지겨워진 유생과 가야금을 켜는 기생들의 음풍농월의 현장이었다. 취기가 돌면 누군가가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운을 띄웠고, 다음 유생이 글을 이었다. 강가에는 인근 부용대까지 실어나르는 나룻배가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는 듯 하다.
영주 역시 경치면에서 안동에 뒤지지 않는다. 순흥 지역에 위치한 소수서원이 국내 최초의 서원이라는 영예를 얻은 데는 인근에 죽계천이라는 빼어난 절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과 도산선생의죽계구곡의 배경이기도 하다.
선조들의 해학과 유머는 수도의 도량인 절에서도 나타난다. 호국사찰로 유명한 영주의 부석사는 원효대사와 함께 통일신라의 대표적 고승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안동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국보 15호)과 함께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무량수전(국보 18호)을 비롯, 5점의 국보와 4점을 보물을 보유한 곳이다.
절에 들면 범인(凡人)을 압도하는 기운이 느껴지지만 정작 절을 창건한 유래는 다소 엉뚱하기까지 하다. 의상대사가 왕명에 따라 이 곳에 절을 지으려 했으나 이교도의 방해로 뜻을 이루고 못하고 있자, 중국 유학시절 그를 사모한 선묘낭자가 죽어 용이 되어 이 곳에 나타나 큰 바위를 하늘에 띄워 이교도를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왼편에는 부석(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볼 수있다. 의상대사가 이 곳에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더니 앉은 곳이 봉정사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길이 제대로 없던 시절, 힘들게 올라온 절간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의 반응은 황당함보다는 피식 웃는 여유가 아니었을까.
스님들의 저녁 예불시간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경내를 진동한다. 전설을 들은 탓일까. 위압감이 아닌 정겨움이 느껴진다. 멀리 소백산 연봉 너머로지는 해의 붉은 빛이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비춘다. 여유로운 저녁 한때의 풍경이다.
/안동ㆍ영주=글ㆍ사진 한창만기자cmhan@hk.co.kr
■안동 영주여행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영동고속도로 남원주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서안동IC에서 나오면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 봉정사로 가는 이정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산서원으로 가려면 남안동IC에서 나와 찾는 것이 빠르다. 영주의 부석사나 소수서원은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나와 순흥, 부석방면으로 가면 된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영주, 안동으로 가는 열차가 하루 7~8차례 운행한다. 1544-7788.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주, 안동방면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안동터미널 (054)857-8296, 영주터미널 (054)631-5844.
#먹을 것
헛제삿밥, 간고등어 등 안동하면 떠오르는 이름난 음식이 많다. 이중 헛제삿밥은 하회마을 인근에 전문점이 즐비하며, 하회마을 내 대다수 음식점에서 취급하고 있으며, 이중 옥류정(054-854-8844)이 이름나 있다. 간고등어는 안동의 대표적 간잽이 이동삼씨가 직접 간을 낸 고등어를 취급하는 양반밥상(054-855-9900)이 유명하다.
영주의 풍기지역은 국내에서 최초로 인삼재배에 성공한 곳. 때문에 인삼을재료로 한 음식이 많다. 풍기인삼으로 끓여낸 풍기삼계탕이 알려져있다. 054-631-4900. 소백산 한우와 정통 평양식 냉면으로 30년째 한결 같은 맛을 내는 서부냉면(636-2457)도 반드시 들러야 할 곳 중 하나.
#숙박시설
대규모 숙박시설은 없지만 관광지답게 깔끔한 숙소들이 많다. 안동파크관광호텔(054-859-1500), 덴마크호텔(821-7000), 갤러리호텔(842-0066), 윈호텔(843-1188, 이상 안동), 소백파크관광호텔(634-7800). 영주호텔(632-4000), 신라궁전호텔(634-1600) 등.
선비의 고장답게 고택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안동의 지례예술촌(054-822-2590), 수애촌(822-6661)이 대표적이다. 23일 문을 여는 선비촌(054-639-6395)은 영주시가 700억원을 들여 소수서원 옆에 조성한 대규모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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