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오세티야 공화국 베슬란의 인질사건을 인근 국가 테러범들과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연합해 저질렀다는 러시아 당국의 발표로 테러범 정체에 관한 논란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이 같은 '다국적 테러설'에 대해 국제적 대처가 필요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체첸 독립 운동'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피하기 위한 러시아 당국의 얄팍한 술책이라는 비판적 지적도 적지 않다.러시아 언론들은 6일 세르게이 프리딘스키 북카프카즈 대검차장이 "인질범들은 10여개국 출신들로 구성돼있다"며 "다국적 무장세력에 체첸인, 타타르, 카자흐스탄, 고려인이 포함돼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다국적 테러'라고 뭉뚱그려 설명하던 러시아 당국이 '10여개국' 등 구체성 있는 언급을 하는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증거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인질범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군복을 입고 방독면과 최신 통신장비를 휴대한 점 등은 국제테러조직과 연계됐을 개연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의 다국적 테러론은 물증에 기초하기 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6일 공개된 생존 인질범은 카프카즈 지방 억양의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물이었고, 사망한 30여명의 테러범들의 신원이 향후 밝혀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또 인질사건 초기 자폭테러를 저지른 체첸 여전사들의 '활약'으로 미뤄 이번 사건이 체첸 독립을 위한 테러의 범주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여기에다 러시아정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 다양한 인종이 섞여있는 카프카즈 지역 특성으로 볼 때 인질범들이 주변 여러 국가들에서 충원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아랍 등 다른 지역 테러리스트들의 합류가 없는 한 다국적이라는 규정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 당국이 알 카에다를 연계시키는 것은 가장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 비탈리 슐리코프는 "체첸 반군과 알카에다의 접촉은 있을 수 있으나 반군이 알 케에다의 명령을 받아 인질극을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말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국내외 비난을 모면하려고 화살을 알 카에다 등 국제테러 조직으로 돌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가운데 사건의 파장이 카프카즈 지역의 종교분쟁, 러시아 내 한인들에 대한 마녀사냥식 보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 카프카즈지역 한인 실태
러시아 학교 인질사건의 인질범 가운데 고려인이 포함됐다는 보도가 한국교민, 특히 체첸을 포함한 카프카즈 지역의 고려인들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렇지 않아도 유색인종에 대한 테러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한인들에게 보복테러 등 불똥이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려인은 러시아 국적인 것으로 알려져 엄격하게 말하면 민족만 같을 뿐 러시아이다. 이와 관련,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러시아측이 이번 인질사건의 국제적 성격을 부각하는 와중에 이처럼 다민족 출신 인질범들을 강조하는 것 같다"면서도 한국인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체첸, 다케스탄 등 카프카즈의 한인들은 구소련 동포(고려인)에다 중국에서 돈벌이를 하러 온 조선족, 북한을 탈출해 이곳까지 밀려온 탈북자 등 크게 세 부류다. 현지 고려인협회는 4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중 주류는 일찌감치 이 지역에 터를 잡은 고려인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온 17만 5,000여명의 고려인 가운데 일부가 55년부터 카프카즈로 재이주했다. 기후가 좋고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 곳곳에서 민족분쟁이 일어나면서 이주 러시가 이루어졌고 특히 타지키스탄 내전 때는 무려 1만여명이 이곳으로 탈출해 왔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안정적이지 못했다. 94년, 95년 2차례의 체첸전쟁과 테러사건 때마다 집과 땅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물론 2001년 고려인 3세 엄유리(51)씨가 체첸공화국의 치안 및 보안업무를 총괄하는 부총리에 오르는 등 지역 사회에서 인정 받는 인사도 나왔다.
고려인이 인질사건에 등장한 것은 2002년 모스크바 극장테러 사건 때. 2명의 고려인이 인질로 잡혔으나 외국인으로 인정돼 조기 석방됐다. 지금처럼 인질이 아닌 인질범에 포함된 경우는 처음이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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