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송다’가 몰고 온 비가 전국을 적시고 있다. 태풍이 곱게 지나가고다시는 오지 않기를 비는 한편 비 그친 뒤의 맑은 대기와 청량한 바람을 기다린다. 계절은 이 비가 오기 전에 벌써 가을이었다. 해질 무렵 불그레하게 물드는 하늘은 도회에서도 아름답고, 아침 저녁으로부는 바람은 들이키고 싶을 만큼 상쾌했다.백로(白露)를 지난 참이니 이번 주말에는 진짜 가을맞이에 나서야겠다.■어린 시절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철부지들 앞에서 한자성어를 즐겨썼다. 가을이면 으레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열심히 책을 읽으라”는 말도 따라 붙었다. 선생님이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을 말하지 않아도 ‘천고마비’만 나오면 몇 편이나 독후감을 써야 하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것과 책 읽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 만도 했지만 그저 놀기에 좋은 계절이니 너무 놀지 말라는 말로 들었다.
■‘천고마비’에는 흉노족에 대한 중국인의 두려움이 담겨 있다. 흉노족이 가을걷이를 앞둔 중국 북방의 변경을 휩쓸어 겨울나기 양식을 준비했기 때문이다.나중에 두보(杜甫)의 조부 두심언(杜審言)의 시에 나온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ㆍ가을 하늘이 높아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가 전쟁의 승리를 가을 날씨에 비유한 것이어서 이를 줄인 ‘추고마비’가 가을 찬사로 널리 쓰였다. 그것이 이 땅에서는 어느새 ‘천고마비’로 바뀌었다. 우려를 띤 ‘천고마비’든 기쁨을 담은 ‘추고마비’든 가을에는 말이 살찐다는 생각은 똑같다.
■어디 말뿐이랴. 여름 내내 대지와 태양을 빨아 들인 곡식과 과일, 겨울잠을 준비하는 개구리와 뱀, 곰까지 살이 오른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입맛이 돌고, 힘이 솟는다.자연의 변화에서 쓸쓸함과 허무함을 느끼는 게 다를 뿐이다. 그 쓸쓸함도 마냥 기쁨으로 치달을 마음에 균형추 하나를 다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가을은 너무 쓸쓸하다. 따스한 겨울을 예약할 수 없는 사람들, 살찌기는커녕 말라 비틀어져 가는가계(家計)에 낙담하는 사람들이 날이 다르게 늘고 있다. 삶을 흔드는 세상의 바람 속에서 이들은 높아지는 하늘처럼 멀리로 나라의 손길을 본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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