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앞장섰던 화폐단위변경(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정치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재정경제부와 한은 등 주로 발권당국 주변에서 진행됐던 디노미네이션 공방에 입법기관이 가세하면서, 점차 공론화 단계로 접어드는 양상이다.디노미네이션은 달러 당 1,000원이 넘는 현 화폐단위는 우리나라 경제규모에 적합치 않은 만큼 지금의 1,000원 혹은 1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새 화폐를 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고액권이나 지폐의 위·변조 방지기능 확충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연초까지 찬반공방이 계속됐던 디노미네이션 논란은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그런 것을 추진할 만큼 한가한 경제상황이 아니다"고 쐐기를 박으면서 공개적 논의가 중단된 상태.
그러나 영국의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한국에 대해 '1원=1유로'로 화폐단위변경을 권고하고, 한은 역시 디노미네이션을 위한 '분위기 띄우기'에 나서면서 정기국회를 앞둔 정치권도 본격적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디노미네이션 자체에 대해선 국회의원 상당수가 공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김효석 정책위의장은 7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행 화폐단위가 도입된 지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경제규모는 100배 이상 커졌고 매년 10만원권 수표발행으로 6,000억원에 달하는 돈이 낭비되고 있는 만큼 화폐개혁(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우제창 의원은 당내 의원들과 함께 1,000원을 1원으로 정하는 것으로 골자로 한 화폐단위변경법 발의를 검토중인 상태.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 등은 고액권 발행을 골자로 한 화폐기본법을 이미 발의해놓고 있다.
디노미네이션을 위해선 법을 고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에서 당장 디노미네이션이 법제화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무엇보다 소관부처인 재경부가 디노미네이션 단행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경제현안이 산적한 마당에 경기부양효과도 불투명한 디노미네이션이 결코 정책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재경부 입장이다.
정부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당 역시 디노미네이션을 밀어붙일 까닭이 없다. 우리당 이계안 제3정조위원장은 "개인적으론 디노미네이션에 찬성하지만 현재 처한 경제상황에서 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디노미네이션 논란은 다시 불거졌고, 논의의 장이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장 이번 정기국회가 아니더라도 디노미네이션은 더 이상 장기검토과제가 아닌 현안과제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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