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제정 후 50년 넘게 숱한 '공안 사건'을 양산해 왔다. 국보법이 탄생한 것은 1948년 12월. 당시에는 여순반란사건(48년 10월) 등 건국 초기의 혼란스런 정정 속에 일단 국가안보 위협세력을 처벌하자는 '한시적' 성격이 강했다.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이 근간이었으며 기본법인 형법 제정(53년)보다 5년을 앞선 기형적인 출발이었다. 이후 군사정권 아래서 '정권 안보'의 도구로 애용되다 90년대 들어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 일부 독소조항이 개정되고 적용 횟수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대표적인 국보법 사건
제정 당시 국보법 폐기안까지 제출하며 국보법 탄생에 반대했던 국회의원 13명이 49년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첫 사례로 거론된다.
58년에는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진보당 조봉암 당수가 평화통일 등 북한측과 유사한 주장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재심청구가 기각된 다음날인 59년 7월 사형당했다.
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국보법보다 한층 수위를 높인 '반공법'을 제정해 정국을 운영했다. 그러나 74년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에게는 국보법을 적용, 대법원 선고 20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강수를 뒀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용공조작 논란과 함께 독재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인권탄압 사례로 지적되고 있다.
80년 전두환 정권은 반공법을 폐지하는 대신 처벌조항 대부분을 국보법에 포함시켜 한층 강화했다. 신군부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이 잇따랐고 이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85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86년에는 '반제동맹 사건' '구국학생연맹 사건'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등 이른바 조직사건으로 대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됐다. 이 과정에서 사건 조작과 강압 수사 논란이 일었다.
최근 국보법 적용 추이
최근 들어서는 국보법 적용이 훨씬 엄격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비판을 수용, 수사기관이 법 적용에 신중해졌고 처벌 수위도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은 최근 한총련 대의원으로 각종 시위에 참가한 혐의로 수배를 받다 검거된 A씨를 전례를 깨고 불구속 기소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98년 395건에서 2001년 116건, 지난해 93건으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국보법 폐지 반대론자측은 이 같은 변화를 폐지 반대의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적잖은 사회적 반발에도 불구, 검찰이 구속 기소했던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씨가 최근 항소심에서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는 등 국보법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논쟁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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