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그리 되려고 그랬던지, 얼마 전부터 뜬금없이 낚싯대가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척척 감기는 손맛이며 팽팽하게 맞당기는 긴장감이 되살아난 뒤로 사무실에서 애먼 전화줄 붙들고 당겼다 놨다 하기를 수삼일. 근년 들어 주말 이틀을 구들장 지게 운전으로 일관하던 인간이, 더께 앉은 낚시 가방을 끼고 앉아 주물러 대자 마누라는 대뜸 바람기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20년 만의 나의 출조(出釣)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바로 그 날, 거짓말처럼 그를 만난 것이다. 낚시의 ‘낚’자만 들어도 낯이 홧홧해지고 오금에 땀 차게 만들었던, ‘완장’의 임!종!술!, 바로 그였다.부지깽이 추스를 근력이 생긴 시절부터 낚시라면 사족을 못쓰던 내게 83년 입학한 대학은 그야 말로 꿈과 낭만, 그 자체였다. 하루걸러 데모였지만,나는 그것을 단군성조 이래 처음으로 민대머리 나랏님이 들어앉은데 따른 화풀이쯤으로 쳤고, 최루탄 발포음은 휴강을 예고하는 축포일 따름이었다. 그러던 그 날, 죽고 못살던 여자와 ‘물반, 고기반’이라는 마을 재종숙 아저씨의 말만 믿고, 의기양양 찾아갔던 판금저수지에서 ‘감독’ 완장의 그에게 걸려 여자 앞에서 당한, 개가 들어도 ‘자존심이 딸꾹질할’ 그 개망신…
그는 내 자리 건너 편에 앉아 있었다. 누르께한 벙거지 모자에 추레한 윈드 재킷을 걸친 그를 알아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찌를 응시하는 그 눈빛, 20년 전 거들먹거림은 없었지만 우람한 체구에 찌를 듯한 그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눈빛은 뒷날 재종숙 아저씨의 전언으로 윤색된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 해 그는 47만평 판금저수지 권역의 제왕이었다. 저수지 사용권을 따내 양어장으로 개비한 벼락부자 최 사장이나, 이곡리 이장이 그에게 불법어로감독의 ‘완장’을 맡긴 것은 서울 동대문시장에서도 통하던 전과1범의 왈짜로 근동에서는 그의 주먹이 곧 법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포악과 행패는 가히 전설적이었다. 왜놈 완장에 채이고, 빨갱이 붉은 완장에 밟히던 입장에서야 ‘더위 먹은 소 보름달 보고도 헐떡대듯’ 완장만 보면 경기가 날 밖에. 게다가 임종술, 그는 완장 이전에도 주먹이라는 무소불위의 완장쟁이 아니던가. 뒤에서야 ‘똥이 무서워서 피할까냐’고들 했지만, 무서워서든 더러워서든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그 같은 정황을 누구보다 꿰고 있던 이가 바로 임종술이었다. 그는 하수 권력의 전범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얼마간 좋아하게 된 것은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사연을 듣고 난 뒤부터였다. 그는 완장의 ‘법적 근거’였던 최 사장의 ‘돈의 완장’에 당당히 맞서다 ‘법의 완장’을 박탈당했고, ‘힘의 완장’으로 끝까지 뻗댔지만 그 해 봄 그악스럽던 가뭄으로 저수지 물이 농용수로 방류되면서 영토를 잃고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그에게 완장은 삶의 외로움을 이기는 보루였고, 그 완장을 지키는 일이 더 큰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던 여자, 부월이와 함께.
미동도 않고 앉은 그에게 쭈뼛쭈뼛 알은 체를 했지만, 첫 반응은 불퉁스러웠다. 사연을 밝히고 배낭에 챙겨간 소주를 꺼낸 뒤에야 그는 마음을 여는 듯 보였다.
-아따, 당신이 그 때 지집들 앞이라고 빳빳허니 뻗대다 디지게 맞은 그 놈, 아니 그 분이여? 허허, 그 땐 좆도 아닌 걸 차고 앉어서 유세헌답시고 못헐 짓 많이 했제.
마을을 떠난 뒤 한 동안은 밥 먹다가도 완장 찼던 오른 팔을 추스르고, 꿈에도 저수지가 뵈더라고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제는 조강지처가 된 부월이의 말을 곱씹었단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우리 둘이서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가 있단 말여!’
-부월이가 얼굴도 반반허니 장사수완이 솔찮여. 술집서 돌라온 패물 판 돈으로 함바집 내서 국시도 팔고, 포장마차도 하고 벨 짓 다했제. 88때는 완장놈들 헌티 포장마차도 빼앗겨불고, 공장 야경꾼도 하고 공사판서 찜통도 지고… 요새? 조 앞에 식당 있잖어. 낚시꾼들 상대로 국밥 팔어. 낚시터 수금원 꿈은 애당초 물 건너갔지만 이래 뵈도 사장이여, 국밥집 사장. 딸년 대학공부 시켰고, 세 식구 이만큼 살았응게 된 거 아녀?
-아직도 완장 천지제. 명함이 완장이고, 차가 완장이고, 루비똥 가방이 완장이고, 집이 완장이고… 자슥새끼들 공부허고 출세허라고 욱대기는 것도 어찌 보믄 완장병이고. 어쨌거나 완장이 행세하는 세상잉게, 그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응게…
그날 나는 국밥집까지 따라갔고, 우리는 억병으로 취했다. 취하고 싶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완장'
문예지 현대문학에 ‘완장’을 연재되던 1981~82년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때였다. 유신 말기부터 의기가 꺾이고, 건강마저 나빠져 거의 절필하다시피 했던 윤흥길씨가 ‘나 부터 마음을 추슬러야겠다’고 작심하고 쓴 것이다. “늘 당하고 힘들게 눌려왔던 권력이라는 것을 물고 늘어져보자는 심정이었죠.”
83년 5월 단행본(현대문학사 발행)이 출간되면서 ‘완장’은 당시 대학가와 지식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신문 사설이며 칼럼에 ‘완장병’이니 ‘완장문화’니 하는 조어들이 등장해 유행하기도 했다.
2002년 재출간 된 책 서문에서 윤씨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해학의 두루뭉실한 그릇에 담아 대상을 원천적으로 수용해 버리는 웃음은 때로 더욱 유효한 공격수단이 될 뿐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비판방식이라고 믿고 있다”고 적었다.
‘완장문화’라는 말은 지난 7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 원탁에 앉아 ‘언론의 완장ㆍ군림문화’를 언급하면서 이 시대 다시 화두로 떠올랐고, 여러 신문 사설과 칼럼들이 그 ‘완장’을 놓고 신랄한 어조로 맞선 바 있다.
그 공방은 대개 ‘우리시대 완장의 주인공 논쟁’이었다. 완장이란 게 권력을 쥔 자나 그에 빌붙은 자의 것이고, 때문에 완장문화라는 말도 완장의 주인공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문맥에 놓여야 마땅하다.
서글픈 것은 우리시대의 완장은 그것이 어느 쪽이든 아니면 둘 모두이든,상대를 향한 삿대질을 자신의 ‘완장’을 감추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듯하다는 점이다. 완장은 은밀해졌고, 그만큼 교활해졌다.
/최윤필기자
■그때 한국일보에는/"완장들의 횡포 파헤쳐… 억눌려온 서민 위로"
윤흥길씨는 소설 ‘완장’을 짤막한 단편으로 구상했다고 한다. 그게 출판사의 거듭된 요청으로 원고지 300매, 500매로 늘어났다가, 연재가 시작되고서는 독자들의 성화에 밀려 1,200매 장편소설이 됐다.
단행본이 나온 직후 한국일보(83.5.24)는 ‘화제의 소설’ 코너에 윤흥길씨의 대형 인터뷰를 싣고 “그는 ‘완장’을 통해 ‘완장을 차지 않은 완장’들의 횡포까지 파헤쳐 억눌려 온 서민들을 위로했다”며 행간을 조심스레 벌려놓았다.
소설은 80년대 중반과 후반 각각 이대근, 조형기 주연으로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산에는 눈, 들에는 비’(93년 세계사 발행),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97년 현대문학사 발행) 등 작가의 후속작을 ‘완장’의 속편으로 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정작 작가는 “한때 속편을 쓸까 하기도 했지만, 작심하고 쓴 적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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