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5일 MBC TV 대담 프로그램에서 작심한 듯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밝혔다. 진보·보수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적지 않은 파장을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최근 국가인권위의 국보법 폐지 권고에 맞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국보법이 합헌'이라는 입장을 밝힌 상황이다. 민감한 시기에 행정부 수반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함에 따라 정치권 및 시민사회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 간에도 국보법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노 대통령은 나름대로 심사숙고 끝에 의도적으로 국보법 폐지론을 꺼낸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기회에 폐지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여권 일부의 국보법 개정론에 제동을 걸면서 국보법 폐지를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복안이다. 이처럼 개혁을 밀어붙여야만 기존 지지층의 동요와 이탈을 막으면서 다른 개혁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국보법 폐지 주장은 최근 노 대통령이 과거사 규명 및 좌파 독립운동 재조명 등을 촉구해온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4·15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은 뒤 노 대통령이 당초의 개혁 구상을 순차적으로 내놓고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론은 대선 공약보다도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에는 국보법 폐지 입장을 밝혔으나 막상 본격적 대선 과정에서는 폐지 보다는 '민주질서보호법' 등으로의 대체 입법을 주장하는 언급을 더 많이 했다. 노 대통령은 그 해 11월 부산 방문시 "국보법 전면 폐지는 아직 이르며 사회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항은 기존 형법이나 새로운 법률로 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번에는 대체 입법 방안을 거론하지 않는 대신에 "꼭 필요하다면 형법 몇 조항을 고치면 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 남북한 간의 화해·협력을 더 진전시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국보법 폐지를 주장했다는 해석도 있다.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으로 정치권의 논란은 더욱 가열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보법 개정을 주장하는 열린우리당 의원 30여명이 노 대통령의 주장을 곧바로 수용할 가능성이 적어 여권 내부의 논란도 계속될 전망이다.
현재 열린우리당 의원 87명이 국보법 폐지 주장에 서명했으나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의원은 한나라당 일부와 민주노동당·민주당의 대다수 의원들을 합쳐도 110여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국보법 폐지 법안이 조기에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노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론은 지난달 김승규 법무장관이 완곡하게 국보법 폐지 반대 입장을 밝힌 것과 상반되는 것이어서 '대통령과 장관이 조율을 하지 않은 것은 시스템 상의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우리당/ "환영" 폐지론 목소리 커져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입장 표명으로 열린우리당에서는 폐지론이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개정론자들은 '대체입법'을 포함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국보법 폐지 추진모임'의 간사인 우원식 의원은 "대통령의 인식이 '추진모임'과 같다는 점을 환영한다"며 "당직 등을 이유로 폐지안 서명에 주저하는 의원까지 합치면 우리당 의원 100명 이상이 폐지 의견을 갖고 있어 9월 중 당론 확정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폐지론자들 사이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의원들에게 영향이 있을 것"(이상민 의원), "대다수가 '폐지 후 형법 보완'에 공감하고 있다"(최재천 의원)는 등 '대세론'을 의식한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반면 개정론자인 김부겸 의원은 "국보법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은 이미 알려진 사실 아니냐"며 "의원들의 소신에도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의미 확산을 경계했다. 하지만 '국보법의 안정적 개정 추진모임'의 간사인 안영근 의원은 "당내 폐지론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며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이종걸 수석부대표 등은 대체입법 추진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당내 개폐론 사이에서 고심하던 이부영 의장은 "대통령의 말씀을 중요한 참조의견으로 생각하고 좀더 넓게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한나라/ "국가 정체성 뒤엎는 망언"
한나라당은 5일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에 대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근본을 뒤엎는 망언"이라고 반발하면서 개정 방침을 재확인했다. 특히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국보법 존치 판결에 도전한 부분에 대해 "탄핵감"이라고 맹공격했다.
이규택 최고위원은 "국보법을 낡은 유물로 치부하고 사법부를 무시한 것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헌법을 정면 부정함으로써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독일 등 다른 나라들도 체제 수호를 위해 국보법보다 강력한 법을 유지하고 있는 등 체제 수호법과 문명 국가 여부는 전혀 상관이 없다"면서 "또 국보법을 굳이 형법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은 현재 국보법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임태희 대변인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인공기를 들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군중집회를 허용하지 않을 거라면 대통령은 헌재와 대법원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면서 "대통령이야말로 국보법과 과거사 등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고 서민경제부터 챙겨 달라"고 촉구했다. 전여옥 대변인도 "헌법수호를 온국민 앞에 맹세한 대통령이 안보와 사상의 무장해제를 선언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완전히 뒤엎었다"고 비난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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