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아이들은 울며 떼쓰다가 "호랑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 지난 수십여 년 동안 한국인들에겐 하던 말을 뚝 그치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그것이다. 옛날 아이들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던 것 이상의 공포였다.그 시절엔 술 한 잔 마시고 북한이나 김일성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국보법에 걸리는 일이 허다했다. "김일성이 젊었을 땐 똑똑하게 잘 생겼더라" 는 말도 '고무찬양'에 걸렸다. 칼 마르크스나 모택동 등에 관한 책을 갖고 있다가 '이적물 소지'에 걸리기도 했다.
일단 걸리면 안기부에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고, 풀려나더라도 '용공'이란 꼬리표가 붙어 감시대상이 됐다. 국보법은 종종 정치적으로 악용됐다. 반대세력을 죽이기 위해서, 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 보안법이 동원됐다. 무고한 사람들이 사소한 혐의로 옥살이를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5일 밤 MBC TV 대담프로에 출연해서 "지난날 국보법은 대체로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람들을 처벌한 게 아니라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법으로 많이 쓰여왔다. 이제 그 낡은 유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 국가보위에 필요한 조항은 형법에 넣으면 된다"고 말했다.
국보법의 부끄러운 과거를 문제 삼아 폐지를 주장한 대통령의 발언은 국보법 존폐 논란을 격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국가 인권위원회는 국보법 폐지를 건의하고, 헌법재판소는 국보법 합헌 결정을 내리고, 대법원은 국보법 폐지 반대 입장을 밝히고, 대통령은 폐지를 주장했으니 이제 중요한 국가기관의 의견이 거의 모아진 셈이다.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졌던 국보법에 대해 이처럼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국보법 논란이 정치화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국회는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정쟁거리로 삼던 자세에서 벗어나 대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국보법 논란은 각자의 주장만 있고 토론이 없었다. 개정을 주장하면 '보수반동' 취급을 하고, 철폐를 주장하면 '용공분자'로 취급했다. 여야가 모두 개정이냐 철폐냐 하는 해묵은 싸움에만 매달리고 있다. 깊이 있게 문제를 파헤쳐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없다.
국민도 다를 게 없다. 철폐론자와 개정론자는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한다. 오랜 친지들 모임에서까지 두 주장이 충돌하면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고 적대감이 노골화한다.
국보법 논란은 편을 가르는 기준, 상대의 이념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국보법 자체는 논란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철폐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개정한다면 어떤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 형법에 포함시킨다면 어떤 규정을 어떻게 고쳐서 넣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철폐냐 존속이냐, 반동이냐 친북이냐, 구호만 춤추고 있다.
국보법 존폐 논란에서 정치적 입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 논란을 정쟁거리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대결에서 이겨야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의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국보법 개폐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당론이 아닌 소신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국보법 남용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는 나이든 세대는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독재, 반보수, 반기득권, 반미, 반전 등 반(反)정서가 강한 집단은 보안법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보안법이 폐지되면 기존의 질서에 염증을 품는 세력이 의도적으로 친북 성향의 문화를 주도하고, 그로 인한 혼란 속에 다시 안보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여론도 만만치 많다. 국보법의 '독소조항'으로 지적돼 온 '찬양 고무' 등이 대규모 집회 등을 통해 현실화할 경우 혼란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흐름에서 현명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정치권의 과제다. 국보법을 정쟁거리로 삼는 것은 역사에 대한 범죄다. 이제부터는 토론다운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장명수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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