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한차현 지음
문이당 발행/9,500원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귀스도르프라는 이는 ‘기억’을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개인(실존)의 표현이라고 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나 누구나 들었을 법한 말 중에 ‘기억은 존재에 의해 선택된 과거’라는 말도 있다.아무튼 ‘기억’이라는 놈은, 뇌의 한 부분 물질로 박제된 채 유물론자들의 책꽂이에 갇혀있던 것을 19세기 서양 학자들이 해방시킨 이래, 프로이트를 비롯한 무수한 학자며 문인 유행가 작사가들이 헤집어 온 고전적인 아이템이다.
그 ‘기억(혹은 망각)’을, 기억을 통해 들여다보는 실존의 문제를, 다시배짱 좋게 물고 늘어진 단편집이 있다. 1998년 등단해 이미 4권의 책을 낸바 있는 소설가 한차현 씨의 ‘대답해 미친 게 아니라고’다.
‘이메일’의 주인공은 어느날 낯선 모임초청 이메일을 한 통 받는다.
그렇고 그런 메일로 넘기려던 그는 메일을 보낸 사람의 전화까지 받고,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문제의 모임에 참석한다. 생일과 이름이 같은, 다만 나이가 다른 이들의 모임. 그 모임은 ‘다른 시공간에 사는 주인공들’이 모여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만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메일 발신자 역시 같은 이름의 60대 남자인데, 그는 참석자들에게 말한다.
이 자리를 주선한 이는 22세의 나였다고, 그는 이미 죽어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 죽음은 육체적 소멸이 아니라 기억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그는 자신의 기억이 미래의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기를 원했다고. 소설은 자살(혹은 삶)이란 육체적 소멸(생존)이 아니라 기억으로부터의 단절(기억의 유지)이라고 말한다.
7편의 단편 가운데에는 망각해야 할 과거가 오롯이 남았을 때 현실의 삶이 겪어야 할 고통을 그린 작품(표제작과 ‘메모리즈 아 메이드 오브 디스’)도 있고, 과거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 인물이 겪는 실존적 고통을 그린작품(‘에로부인전’)도 있다. ‘차이와 반복, TV적인 것과 리모컨적인 것이란’은 다른 작품과 달리 사소한 기억의 문제, 콘도에 놀러 온 4명의 청년이 리모컨을 찾지 못해 벌이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멀쩡하게 쓰던 물건이 갑자기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상황. 일행 중 누군가가 리모컨을 쓰고 무심코 어디다 둔 뒤 잊어버린 것일 텐데, 그 하찮은 기억의 상실이 소집단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우리의 일상처럼 유난스럽다.
그의 작품에는, 전작들이 그러했듯, 황당하다고 할 만큼 기괴한 설정과 서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20개월 동안 아이를 밴 여자가 외계인 남편을 만나고, ‘천오백 살하고도 13년을 더 산’ 노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희롱하는, 정통 리얼리즘 기법과의 이 같은거리 두기에 대해 작가는 “평범한 것이 싫어서”라고 했다. 평론가 이명원씨는 “그의 낯선 소설문법은 무겁고 진지하려는 관성을 지닌 평론가들을 난감하게 만든다”며 “평론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도 그의 소설이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평했다.
/최윤필기자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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