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의 고집에서 이제 좀 벗어나고 싶은데….”나희덕(조선대 교수) 시인의 이 말은, 다소 흥감스럽게 듣자면, 파격적이다. “시가 추구하는 자기 완결성, 그 완강한 틀에 막혀 말하는 자아 이외의 존재들이 들락거릴 수 없는 닫힌 구조가 답답해지기 시작했어요.”
닫힌 구조를 열겠다는 것은 시를 통해 읽는 자아와의 소통의 여지를 넓히겠다는 것이고, 시적 유희란 기왕의 시에 가했던 시인의 자기 검열의 기준을 넘어서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그의 다섯번 째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 기존의 시들과 다소 달라보인다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 그 변화의 지향의 징후를 보자.
지금껏 그의 시들은,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진수 씨의 말처럼,따뜻하고 단정했다. 대개가 하찮거나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오래 깊이들여다보고. 스치듯 부딪치는 체험을 속으로 삭이고 삭여서 재현하는 세계였다.
넉넉한 품으로 감싸 안으니 푸근함이고, 거친 시적 감흥의 결을 다듬고 정제해 내놓으니 단아함이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의 일부 시에서 시인은 시의 옷 윗 단추 하나쯤을 풀어헤쳐 놓았다. 상대적으로 말이 긴, 시인의 표현으로는 어법이 이완된 시들이적지 않다. 산문시의 형태를 띤 ‘가을이었다’나 ‘갈증’같은 시편, 30행에 육박하는 시행의 몇몇 시들이 그렇다.
감정의 이면, 관념의 깊은 골을 더듬기도 한다. 그는 꽃이나 열매 같은 것들을 말려두곤 하는데 “…/ 스스로의 습기에 부패되기 전에/ 그들을 장사지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풍장의 습관으로 나를 이끌곤…(‘풍장의 습관’)”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인은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거나 순도 지향의 자기 검열로 고집스럽게 눌러놓은, 결핍된 관능처럼 진한 욕망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삶의 한계, 그 존재적 결함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후기에서 시인은 불멸의 상징 같던 말린 석류의 단단한 껍질을 뚫고 어느날 작은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적는다. “아, 육체란 얼마나 덧나기 쉬운 것인가…. 나는 그 순간 삶이란 완벽한 진공 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차라리 안도했다.”
이래서 그의 시는, 단정함을 흐트려 놔도, 따뜻하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인 ‘여’에서 파도의 울음소리를 듣고, “…여 주변을 낮게 맴”도는 새들의 젖은 날갯짓에서 ‘여’라는 소리를 듣는다(‘여, 라는 말’).
삽이 떠 놓은 밭 흙 한 덩이를 두고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래서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고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한 삽의흙’)”하고 혼자 뇐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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