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만난 자리마다 지난 시절 이야기가 부쩍 많이 늘었습니다. 추억할 거리가 많이 필요한 계절, 가을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살기 어렵다 보니 옛 시절이 생각나는 것일까요.올 가을에는 더 늦기 전에 버스를 추억해보려 합니다. 아직도 거리를 가득채운 버스들을 뭣 하러 그리워하냐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알록달록한 버스들에 아직 정이 붙지 않아서인지, 요즘 자꾸 먼지를 뒤집어쓴 옛날 버스들이 슬슬 보고 싶어집니다.
한 친구는 어머니와 버스를 타고 약수터에 가면서 기사 아저씨 옆 엔진박스에 앉았을 때의 따끈따근했던 느낌이 생생하다고 합니다.
술 취해 집에 가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던 일, 옆 좌석의 멋진 남학생 때문에 가슴 설레던 좌석버스, 친구들과 종점에서 종점까지 아무 이유없이 왕복하며 행복감을 느꼈던 작은 여행…. 이처럼 십수년 동안 버스를 타고다니면서 맛봤던 기억들을 풀어놓자면 끝이 없지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무용담을 털어놓으면 더욱 흥미진진해집니다. 기점에서 이미 꽉꽉 들어찬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학생들, 한 명이라도 더 밀어넣으려고 이를 악물던 차장 누나.
‘콩나물 시루’ 같이 꽉꽉 들어찬 버스에 승객을 더 태우겠다며 ‘관성의 법칙’을 이용해 급정차, 급회전으로 공간을 만들던 기사 아저씨, 출구까지 갈 엄두를 못 내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던 용감한 남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는 웬만한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합니다.
저마다 마음 속에 몇 개씩은 품고 사는 옛 버스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이 점점 작아져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버스에 대한 추억들을 모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허전해, 술잔 기울이며 그리워할 거리가 필요하다면 기억 속에 아직 달리고 있는 추억의 버스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한번 외쳐보세요. “잘 가라, 내 청춘의 버스야.”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1번 버스 25년 운전 이순학씨
7월1일, 버스 시스템이 바뀌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버스는 방배동에서 정릉을 오가던 1번 버스였다. 1966년 만들어져 정릉에서 고속터미널을 지나 강남 지역을 연결하던 버스였기에 지하철이 없던시절, 시골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의 인기 노선이었던 1번. 7월부터 1번 버스는 1014, 1013, 1113, 1114, 1020번 지선버스로 나뉘어 사실상 사라졌다.
이 버스를 25년 동안 쭉 운전해왔다는 이순학(63)씨. 그는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춰지고 교통카드로 요금을 계산하는 ‘깔끔한’ 현대식 버스가 싫은 건 아니지만 종종 ‘1번’이 그리워지는 게 사실”이라며 웃는다.
좌석버스와 택시 등을 몰던 이씨가 1번 버스를 맡은 것은 1980년. 1번과 3번 노선을 운행하던 당시 동양교통(현 대진여객)에 입사해 지금까지 지각이나 결근은 물론 휴가 한 번 없근무해왔다. 버스체제 개편 이후 이씨가 맡은 것은 ‘정릉-광화문’을 오가는 지선버스 1020.
이씨가 지금도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오라이’를 외치던 차장, 즉 ‘안내양’이다. “그 때는 승객이 얼마나 많은지 차장이 아무리 밀어도 안 되는 거야. 정거장 승객들은 욕해대지, 버스에 탄 사람들도 죽겠다고 난리지…. 15~16살 하는 안내양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일쑤였어요. 그럴 때면 저도 나가 사람들을 밀어 넣곤 했죠.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벨이 없던 시절, 차장이 토큰으로 버스 벽을 한번 치면 ‘통과’, 두 번 치면 ‘정차’를 뜻했다. 힘든 몸이지만 ‘아저씨들’ 도와준다고 틈나는대로 버스 청소까지 도맡아 하던 고마운 안내양들이 이씨는 요즘 부쩍 보고싶다.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아주머니 기사가 날 알아보더라고. 친하게 지내던 안내양 아가씨였지. 어쩐지 마음이 찡했는데 그 친구도 그랬는지 요금도 안 받으며 그냥 가라고 합디다.”
냉난방 시설이 없어 겨울에는 발이 시리지 않도록 운전석 아래 짚으로 엮은 가마를 두었다. 여름에는 바로 옆에 있는 엔진 때문에 땀이 뻘뻘 나서차고지에 들어오면 찬 물을 양동이에 떠서 그 위에 얹어두기도 했다.
눈이 오면 두꺼운 ‘쇠체(쇠 체인)’를 바퀴 한 쪽에만 감아 철커덕 소리가 나던 기억, 지하철 공사로 우회하던 골목길을 가로막은 승용차 주인을 찾는라 집집마다 두드리던 일, 나라에서 방한복 하나씩 맞춰줬다며 뛸 듯이 기뻐하던 어린 ‘안내양’…. 오랜 버스에 대한 이씨의 기억은 아직 바래지 않은 채다.
“25년 동안 버스를 몰면서 네 딸 시집 다 보내고 작은 집 한 채와 출퇴근용 자가용도 마련했죠. 승객들도 훨씬 순해지고 3시간씩 걸리던 왕복시간도 1시간으로 줄었는데, 요즘은 어째 옛날이 더 좋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내 얼굴 보고 탔다가 ‘터미널 안 가냐’고 묻는 20년 단골 할아버지 할머니 손님들에게도 왜 내가 괜히 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김신영기자
■변천사
우리나라 버스의 역사는 1949년 8월16일, 서울에서 운행된 중형버스 157대와 대형버스 105대로 시작됐다. 계획은 꽤 거창했지만 막상 시범운영이 끝나고 9월 정식운행이 시작되자 정상적으로 다니는 버스는 32대밖에 없었다.
이유는 중형버스 ‘남바(number)’ 지정 수속 지연과 휘발유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 버스는 거의 군용트럭을 개조한 것이라 한번 고장이 나면 부품이 없어 수리가 불가능한 것도 문제였다.
이처럼 어렵게 시작한 버스는 한국전쟁 후 눈에 띄게 발전, 한 때 전국 버스 등록대수가 2만대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휘발유 조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서울시에서 운행하는 시내버스 592대 중 300여대는 아예 다니지를 못했고 그나마 다니는 버스도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했다.
요즘은 버스가 너무 급하게 출발해 문제가 되지만 당시 버스들은 상습적으로 정류장에 오래 머무르기 일쑤였다. 심지어 승객이 만원이어서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때조차 10분 이상 정류장에서 꼼짝 않는 일도 다반사였다. 승객의 불만이 극에 달하자 정부는 급기야 54년 4월, ‘내리고 타면 바로 떠나기’ 운동을 실시했다.
58년 휘발유 부족으로 모든 버스는 디젤엔진을 달고 59년 2월 서울 시내버스의 모든 차장은 여성으로 교체됐다. 그러나 승객은 여전히 많아 출발점에서 이미 버스가 터질 듯 꽉꽉 들어찼다. 중간 정류장에서 문을 여는 버스의 차장들은 억울하게도 1시간 넘도록 버스를 타지 못하고 기다렸던 승객들의 욕설과 분풀이를 받아줘야 하는 비애를 겪어야 했다.
74년 8월15일, 서울역과 청량리를 연결하는 지하철이 개통하는 것을 시작으로 80년대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가 시작됐다. 지하철 개통으로 승객 수가 줄고 급격한 산업화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안내양은 점차모습을 감췄다. 이에 따라 83년 7월부터 ‘시민자율버스’ 운행이 확대되고 86년에는 ‘앞문 승차ㆍ뒷문 하차’ 캠페인과 더불어 자율버스제가 본격화했다.
85년 10월 ‘서울역-한강대교’, ‘동대문-신설동’ 도심방향으로 첫 버스전용 차로제가 시행되고 86년 7월에는 모든 버스에 냉난방 시설이 설치됐다. 이어 94년 12월 충전식 버스카드가 도입되면서 회수권과 토큰도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참고자료 ‘서울교통사(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나의 버스, 우리들의 버스
서울 여의도의 증권회사에 근무하는 회사원 김양길(29)씨는 대학 시절, 대치동에서 안암동까지 11번을 타고 등ㆍ하교했다. 대치동에서 성수대교를 건너 직진하면 불과 4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11번 버스는 성수대교 사거리에서 좌회전, 한남대교를 넘어 버티고개, 신당동, 왕십리를 돌고 돌아 경동시장을 ‘찍고’ 고려대로 향했다.
6호선 공사가 한창일 무렵 대치-안암동 코스는 무려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는데 꼭 그 버스를 타게 되는 겁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때가 아니면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어서라고나 할까요. 왜 어릴 때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기’ 놀이 하던 것과 비슷한 심리인것 같아요. 요즘 노선이 바뀌고는 버스 탈 맛이 잘 안 납니다. 오히려 가도가도 끝 없던 기나긴 노선의 11번 버스를 다시 타고 싶어요. 우습죠?”
김씨의 경우처럼 버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추억’은 커녕 ‘악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천연색 신형 버스를 타고 다니다 문득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정원의 다섯 배쯤은 태우고 달리던 ‘구형 버스’가 그리워지는 건, 단지 가을이기 때문일까.
고생스럽던, 그러나 그리운 '차장'시절의 추억
1974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장태한(48) 교수는 인천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다. 집 옆에 있던 모교 인천고가 1학년 때 도시계획에 따라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시내로 이동하면서 장 교수의 ‘버스 역정’도 시작됐다.
“사람이 많아서 내려야 할 때 못 내리고 지각하는 친구들도 허다했어요.용기있는 녀석들은 차창 밖으로 가방을 집어던진 후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도 했습니다. 차장 누나가 우리를 억지로 집어넣다 안되면 기사아저씨가 관성의 법칙을 이용, 버스를 확 틀어서 사람들을 입구 반대쪽으로 몰아넣어 자리를 마련했죠.”
70~80년대, 등ㆍ하교 시간에는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으레 학생들의 가방을 맡아줬다. 남녀 학생들이 만원버스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던 것이 안쓰러워 베푸는 배려였지만 내릴 때쯤 앉아있는 승객 얼굴 높이까지 쌓인 비슷비슷한 가방 중 자기 것을 찾느라 지각하는 학생도 많았다. 여성재단 강경희 사무총장 역시 아주머니의 선심 덕에 지각한 기억을 갖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70년대 버스라는 것이 한 곳에 서있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가방을 맡겨두고 내릴 때가 돼보니 어느새 한참 뒤로 제가 밀려있는 거에요.
별 소리 다 들어가며 사람들을 밀치고 가방을 맡아준 아주머니를 간신히 찾아갔는데 그분 말씀이 ‘너무 무거워 주변 사람들과 가방을 나눠 들었다’는 겁니다. 그쯤 되면 제시간 등교는 물 건너간 거죠.”
껌 포장지로 회수권, 10원짜리 뭉쳐 뻔뻔한 할인
지금이야 카드가 모든 계산을 정확히 알아서 해주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동전과 회수권을 ‘조작’해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각종 기술이 난무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 ‘친구’에 나오는 ‘10장 회수권 11장 만들기’ 테크닉.
회사원 김흥삼(30)씨는 “10장 묶음의 회수권을 정해진 절취선 보다 약 2~3㎜ 정도 모자라게 자르면 쉽게 11장을 만들 수 있었다”며 “중동고 재학 시절 10장 묶음의 회수권은 우리에게 11장 묶음을 뜻했다”고 회상한다.
“조금 더 용기있는 녀석들은 아예 회수권을 절반으로 자르기도 했어요. 요금 통에 회수권이 일단 들어가면 추궁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 반으로 자른 회수권을 구기고 접어 꼬깃꼬깃하게 만든 다음에 태연하게 집어 넣는거죠. 대담하게도 껌 포장지를 회수권 대신 사용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성인 중 토큰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10원짜리 동전을 애용했다.버스 요금이 90원 하던 시절 10원쯤은 으레 할인 받는 걸로 생각하고 10원짜리 동전 뭉치를 한꺼번에 집어넣어 버스 운전 기사를 교란시키는 작전이다. 버스 차장이 있던 시절 차장을 밀치고 줄행랑을 치던 짓궂은 남자 고등학생들도 물론 요주의 대상이었다.
홍보대행사 프레인 박수미(32) 팀장은 “여고생 사이에 오래된 토큰을 지니고 있으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징크스도 돌았다”고 회상한다.“그 말을 믿고 엄마 주머니를 뒤져 오래된 토큰을 골라내던 기억이 생생해요. 대학입시의 압박 속에서도 작은 낭만을 찾던, 교복입은 소녀시절이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새까만 토큰 속에 남아있습니다.”
신촌 12번, 안암동 28번…잊지 못할 번호들
7월1일, 버스번호가 100% 바뀌면서 사라져버린 이전의 버스번호들도 잊지못할 추억거리다. 연세대, 이화여대를 지나 압구정동, 대치동, 개포동을 오가던 12번 좌석버스는 연애하는 청춘남녀가 많아 이른바 ‘연애버스’,혹은 ‘에로버스’라고 불렸다.
진선, 정신, 영동여고 등 강남의 여고 세 곳을 연결하던 63-1번 버스도 일대의 남고생들 사이에는 꽤 유명했다. 고려대에서 강남쪽을 연결하던 28번버스는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것이 특징이었다.
회사원 조모(여ㆍ31)씨의 회고. “30분 동안 한 대도 오지않다가 한꺼번에 대여섯 대씩 몰려와 열받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대학교 1학년 때, 한번은 ‘왜 배차시간을 안지키고 몰려다니느냐’고 항의했더니 아저씨가 씩 웃으시면서 ‘혼자 다니면 심심하잖아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물론 차가 막혀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겠지만 재치있는 이 대답에 저와 승객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28번 아저씨들이 신호에 걸릴 때마다 일렬로 서서 창문과 문을 열고 ‘틈새 잡담’을 즐기시는 거 있죠.”
막상 청량리는 가지도 않으면서도 유흥가를 떠올리게 해 각종 음흉한 우스개소리를 만들어냈던 588번, 서울대생과 신림동 고시생들을 노량진과 강남역으로 실어 나르던 289번 시리즈, 압구정동에서 말죽거리와 대치동, 가락동을 지나 청계산까지 연결하던 78번 시리즈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후 총천역색 버스 사이로 쓸쓸히 사라져갔다.
/김신영기자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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