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1203>9월학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1203>9월학살

입력
2004.09.02 00:00
0 0

1792년 9월2일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단계를 맞기 시작했다. 혁명의 전파를 염려한 프로이센의 침공으로 이 날 베르덩이 적군의 손에 들어가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와 증오에 휩싸였고, 장폴 마라를 필두로 한 코뮌 지도자들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인민의 정의'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날부터 9월7일까지 엿새 동안 이들의 부추김에 힘입어 열성적 혁명 지지자들 수백 명이 파리의 감옥들을 습격해 수인(囚人)들을 재판 없이 잔혹하게 살해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9월학살이라고 부른다. 파리의 감옥들에는 8월10일 시민 봉기로 국왕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탕플탑에 유폐된 이래 불과 세 주 동안 왕당파로 지목돼 체포된 수인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다.엿새 동안의 학살에 희생된 수인들은 1,200여 명에 이른다. 9월3일 살해된 사람 가운데는 어려서 시집온 왕비가 친언니처럼 따랐던 랑발 공작부인이 있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탕플탑까지 운반한 뒤 왕비 거처의 창(窓) 앞에 전시했다. 이 끔찍한 정경은 불과 한 해 뒤 그 자신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할 왕비에게 제 운명을 암시하는 또렷한 흉조였을 것이다. 혁명정부의 법무장관 조르주 당통은 이 모든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코뮌 지도자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회람장을 보내 수인들 사이에서 반혁명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며 파리 학살을 정당화했고, 지역에서도 같은 조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베르사유, 랭스, 리옹, 캉을 비롯해 회람장이 도착한 많은 지역에서도 파리에서와 비슷한 방식의 학살이 저질러졌다. 9월학살은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파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역사가들에게 프랑스혁명은 인류 역사의 결정적 진보를 이룩한 쾌거로 찬양되지만, 그 혁명사의 페이지 곳곳에는 피비린내가 그득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