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넘겨 또 한 번의 ‘부활’을 선언한 아테네 올림픽. 그 평가는어떻게 나타났을까. 그보다 또 한 세기가 지난다면 올림픽의 모습은 어떻게 변모할까.헬레니즘의 오디세이와도 같은 아테네의 축제를 지켜보면서 그 화려함에 한편으로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누를 길 없었다. 대회의 성패를 떠나 올림픽의 생명인 페어플레이 정신이 흐려지고 규칙의존엄성이 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분명 대회는 축제라는 의미의 성과 면에서 성공작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유럽 문명의 모체와도 같은 올림픽 문화를 다시 꽃피우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전란의 땅’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우려했던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다. 충돌도 갈등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고대 문화유산을 다시 보는 듯한환상의 예술성을 아낌없이 과시했다.
그러나 올림픽이 이것으로 끝날 일은 아니다.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전진해야 하고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유럽에서 아시아로 불꽃이 옮겨가면 또 다른 빛을 발할 것이다. 서양의 신화에 이제는 동방의 영혼을 불어 넣게 될지도 모른다. 또 한번 변해야 하는 이유이다.
“변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약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다. 스포츠에서 변화는 인생에서 그런 것처럼 필수적이라고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지난 주말 특집판에서 강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이 신문은 또 “스포츠 게임의 변화는후에 나타나는 엄청난 사회적 변화의 시발점이 되곤 한다”고 지적했다.
아테네를 바라보며 우리는 회의와 충격에 빠졌었다. 첫째는 엄격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약물복용 사태가 만연하는가. 둘째는 판정 불공정이 왜 잦아지며 이를 왜 지켜만 보고 있는가. 셋째 해프닝으로만 보아 넘길 수 없는 마라톤 레이스 방해 사고를 막을 길은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지난 날 서울 올림픽에서 보았듯이 약물복용은 대표적인 반윤리적 사례로 지목되고 있는데도 최악의 사태에까지 이른 이유가 무엇일까.
이보다 답답한 일은 심판의 실수가 증명되었는데도 알 수 없는 규정 때문에 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체조의 불공정 시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오심의 수혜자, 해당 단체의 책임자, 그리고 대회 운영의 주관자가 서로 처리를 떠밀고 있으니 그 꼴이 말이 아니다. 오죽하면 관중들이 나서서 손가락으로 판정을 심판했을까. 여기에는 규칙을 잘 모르는 게임 당사자, 구체적으로 팀 임원들의 무지도 깔려 있다. 솔트레이크 시티 ‘오노’ 소동의 재판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스포츠는 규칙의 게임이다. 곧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다. 아울러 최선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올림픽을 통하여 더욱 성숙해진 우리 국민이 금빛보다 더 많은 은빛, 간발의 차이로 꿈을 놓친 불운의 패배에 더 뜨거운 갈채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빼앗긴 영광의 아픔만큼이나 못다 이룬 꿈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 감동은 그래서 더 진하게 우리의 가슴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강렬한 챔피언의 눈빛을 우리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올림픽사(史)는 시드니의 악몽을 떨치고 다시 전진하고 있다. 세계톱 10, 메달 순위 한 자리의 의미보다 고른 발전의 저력, 새로운 가능성을 주목하게 된다. 자랑은 이르다. 자만은 더욱 나쁘다. 아테네에 쏟았던 국민의 그 뜨거운 열정을 생각한다면 한국 체육도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이태명 명지대 객원교수/스포츠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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