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9월1일 철학자 미셸 세르가 프랑스 아장에서 태어났다. 세르의 학문 세계를 압축하는 말은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사자(使者: 메신저) 노릇을 하는 신이다.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에 해당하는 헤르메스는 부업으로 지식과 교역을 관장한다. 세르는 다섯 권의 '헤르메스'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일차적 관심이 지식들 사이의 중재와 소통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그 다섯 권의 '헤르메스' 시리즈는 '의사소통'(1969), '간섭'(1972), '번역'(1974), '배분'(1977), '북서 항해'(1980)다. 마지막 책의 제목에서 세르가 사용한 바다 은유는 그가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 잠시 해군학교엘 다녔고 사범학교 졸업 뒤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슬며시 환기시킨다. '북서 항해'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또는 예술적 실천 사이로 난 뱃길을 따르는 항해다. 이런 사잇길을 헤쳐가는 지적 항해를 통해 세르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예술) 사이의 소통을 확보하는 현대 학문의 헤르메스가 되고자 했다.
흔히 과학철학자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데서도 짐작되듯, 자연과학에 대한 세르의 관심은 젊은 시절부터 어기찼다. 박사학위 논문도 '라이프니츠 체계와 수학 모델들'(1968)이었다. 세르는 자연과학을 포함해 어떤 개별과학도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은 가역적이고 필연적이고 폐쇄적인 뉴튼 역학체계가 아닌, 불가역적이고 우연적이고 개방적인 열역학체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르에 따르면 지식의 형태나 본성은 옷을 하나 벗고 나면 그 안에 또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어릿광대 할리퀸을 닮았다. 세르의 분석 대상이 베르그송의 철학서에서부터 쥘 베른의 소설을 거쳐 에르제의 만화 '탱탱'에 이르기까지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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