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년 8월31일 '천로역정(天路歷程:The Pilgrim's Progress)'의 저자 존 버니언이 런던에서 작고했다. 향년 60세. 침례교 목사였던 버니언은 당대 영국을 휩쓴 비국교파(非國敎派) 박해 움직임에 휩쓸려 10여년간 옥살이를 했지만, 그의 우의소설 '천로역정'(1678∼1684)은 영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문학사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경건문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소설의 1부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처자를 버리고 멸망의 도시를 떠나 온갖 고난 끝에 하늘의 도시에 다다르는 여정을 그렸고, 2부는 크리스천의 처자가 그의 뒤를 쫓아가는 과정이다.'천로역정'은 한국문학사에도 큰 기여를 했으니, 1895년 캐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이 번역하고 김준근(金俊根)이 판화를 그려넣어 원산에서 간행된 '천로역정'은 소설언어로서의 근대한국어를 벼려냈다. 대부분의 국민어문학은 번역에서 시작됐다. 한국어문학도 예외가 아니니, 문자로서의 한국어, 곧 한글 문헌의 시초는 '훈민정음 언해'(1446)라는 번역문이었다. 단순한 문자언어에서 세련된 문학언어로 도약하는 데도 번역은 그 디딤돌 구실을 한다. 프랑스어문학의 밑자리에는 플레야드파의 고전 번역이 있었고, 문학언어로서의 근대 독일어의 모판을 고른 것은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성서다.
한국어가 문학언어로 정착하는 데도 15세기의 '두시언해'에서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1)에 이르는 적잖은 양의 번역 문헌들이 기여했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출발어(번역되는 언어)의 문학보다 도착어(번역하는 언어)의 문학에 더 이바지한다. 예컨대 영어본 '서정주전집'보다는 한국어본 '셰익스피어전집'이 한국어문학의 자산에 가깝다.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영문학의 자산이지만, 게일의 번역본 '천로역정'은 한국어문학의 자산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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