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한국시각) 저녁 폐막의 황혼이 드리우기 시작한 아테네올림픽 파나티나이코스타디움. 태극 궁사들이 금빛 시위를 당겼던 이 곳에서 전세계 사람들은 진정한 스포츠영웅을 목격했다.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와 메브라톰 케블레지기(미국)에 이어 3번째로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낸 반드를레이 리마(브라질). 트랙에 들어서자 리마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관중들을 향해 입에 맞춘 두 손을 앞으로 내미는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결승선을 바로 앞둔 리마는 양팔을 크게 벌려 트랙을 지그재그로 오가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브라질 국기를 들고 트랙을 도는 리마의 얼굴에서 불과 20분 전 그에게 들이닥친 고통과 충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서 ‘리마! 리마!’를 연호했다. 일부 관중들은 ‘돈 크라이(Don’t cry), 리마!’를 외치며 그들 자신이 울고 있었다.
막판 레이스가 시작된 37㎞ 지점. 2위 그룹을 28초 이상 따돌리며 질주하던 리마는 사상 초유의 불상사와 마주쳐야 했다. 노란 색 베레모에 붉은 색 킬트를 입은 한 관중이 도로로 뛰어들어 리마를 인도쪽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종말론을 믿는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신부인 코르넬리우스 호런(57). 그는 지난해 포뮬러원 브라티시그랑프리에서도 트랙 중앙에 서서 “성서는 진실”이라고 외치는 등 각종 대회를 망쳐온 사고뭉치였다.
올림픽보안에 쏟아부은 12억 유로의 막대한 경비를 비웃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벌어진 ‘마라톤 습격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리마였다. 페이스가 뚝 떨어진 리마는 발디니와 케블레지기의 추월을 지켜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35살 노장 마라토너의 첫 금메달 꿈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조국 브라질은 “1등을 도둑맞았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리마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동메달을 따낸 것 자체가 위대한 성과”라며 만족스러워 했다.
리마는 또 마라톤코스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라톤은 팬과 함께 해야 한다”며 일축했다. “끝까지 달리게 한 것은 올림픽정신”이었다는 리마. 그는 오심과 약물파동으로 얼룩진 아테네올림픽을 향해 신이 선사한 마지막 축복이었다.
아테네=박진용 기자 hub@hk.co.kr
■伊 발디니 빛바랜 우승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발디니(35)가 아테네의 마라톤평원을 정복했다. 30일(한국시각) 아테네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막판 역전극을 펼치며 2시간10분55초로 우승한 발디니는 지난달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이봉주(삼성전자)와 함께 고지훈련을 했던 선수.
당시 훈련캠프에 함께 있었던 삼성전자 관계자는 “발디니가 올림픽 직전 이혼을 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고 심적으로 크게 방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특유의 강인한 의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상처를 그리스 평원에 묻었다.
발디니는 2001년 애드먼턴 세계선수권대회와 파리, 런던마라톤에서 3차례나 이봉주와 동반 레이스를 펼쳐 국내팬에게도 낯익은 선수.
애드먼턴 세계선수권과 지난해 파리 세계선수권에서 연속 3위를 차지했으며 최고기록은 2시간7분29초로 이봉주(2시간7분20초)보다 약간 뒤지지만 2시간7~8분대를 꾸준히 유지해 기복이 없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폼을 갖고 있으며, 하프마라톤 훈련을 많이 해 순간 스피드가 일품이다. 발디니는 레이스 직후 “초반 선두권이 속도를 내지않아 다소 불안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4~5㎞에서 스퍼트 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결과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디니의 우승은 37㎞ 지점에서 발생한 ‘불상사’로 빛이 바랬다. 발디니는 제일 먼저 결승테이프를 끊었지만 관중과 취재진의 관심은 3위로 들어오는 불상사의 주인공 반드를레이 리마(브라질)에 쏠렸다.
김혁 기자 hyuk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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