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 이후 생겨난 노숙자는 이제 익숙한 서울 풍경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그 전에도 걸인 부랑아 행려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부의 격리수용으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환란과 함께 등장한 노숙자들은 그 수도 적지 않거니와 불황의 장기화와 함께 사회현상으로 굳어가고 있다. ‘노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우리 사회의 경쟁구조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의 형태’라는 ‘노숙인 권리선언문’의 한 구절에서 보듯 노숙자는 경쟁적 사회구조의 산물이다.■ 서울시와 노숙인 다시서기지원센터 집계에 따르면 올들어 감소추세를 보이던 서울지역의 노숙자수가 6월부터 늘기 시작, 지난 15일 현재 2,700여명에 달했다. 2000년 월평균 3,500명 선으로 폭증했다가 지난해에는 월평균 2,800명으로 줄어들었고 올 들어서는 계속 감소추세를 보이다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수용시설을 기피하는 거리 노숙자는 750명 수준으로 2000년 7월의 580명 수준을 넘었다. 추운 겨울에도 거리 노숙자가 500명 선을 유지한다고 한다.
■ 노숙인 다시서기지원센터가 서울지역 노숙자 250명을 대상으로 노숙 이유를 설문 조사한 결과 실직 37.4%, 사업실패 14.5%, 부채 등 신용불량 10.4% 등 경제상황과 연관된 것이 62.3%에 달했다. 이혼 등 가족해체가 23.7%로 나타났는데, 이 역시 가정의 경제사정 악화가 직접적인 원인임을 감안하면 빈곤이 노숙자를 만드는 요인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숙자들은 빈곤 때문에 노숙자가 되었지만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노숙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묘한 속성을 갖고 있다.
■ 1년 전 이맘때쯤 캐나다인 노숙자와 알고 지낸 적이 있다. 세종문화회관 옆 처마 밑에 짐을 푼 그는 중국을 떠돌다 한국에 와 노숙생활을 했다. “이 생활이 맘에 드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동안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힘들고 이런 나를 혐오한다”며 “노숙자(the homeless)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희망을 잃는 것(hopeless)”이라고 말한 기억이 새롭다. 몸에 밴 무기력증과 절망감이 그 어떤 행동도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어설 줄 모르는 우리 경제가 혹 노숙자의 무기력증에 감염된 것은 아닐까 두렵다.
방민준 논설위원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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