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무더위에 바짝 가물다가 한차례 큰비가 내리고 나면 그 빗물을 받아 제일 먼저 새파래지는 곳이 바로 고구마 밭이다. 비 한 줄금에 고구마 순이 온 밭의 두둑을 다 덮는다.고구마가 잎이 너무 무성해지면 땅속의 씨알이 잘다. 땅속 열매로 가야 할 양분이 줄기로 다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로 순을 잘라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고구마 줄거리’다. 그러나 요즘은 땅속 열매를 키우기 위해 순을 잘라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물을 얻기 위해 고구마를 심는 밭도 많다고 한다.
어릴 때 이렇게 비온 뒤 고구마 순을 자르듯 감자 밭에 가서 감자 꽃도 참 많이 땄다. 꽃을 그냥 두면 꽃진 자리에 포도알 만한 열매가 조록조록 달려 땅속 감자로 가야 할 영양분을 뺏기 때문이다.
한때 대관령에서 배추농사를 지은 어린 농군이었던 적은 있지만, 이제 내 몸은 농사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땅에 대해서 마음으로도 정직했고, 몸으로도 정직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걸 머리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오늘처럼 고구마 줄거리로 만든 반찬이 식탁에 올라오는 날, 갑자기 그 시절의 내 노동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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