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이 말(言)을 안 듣는 바람에….”말이 문제였다. 사격 펜싱 수영 승마 육상 등을 차례로 겨루는 근대5종에서 가장 큰 변수는 승마. 다른 종목과 달리 짐승인 말과 함께 일심동체가되야 할 뿐더러 탈 말조차 제비 뽑기로 정하기 때문. 나폴레옹시대 전령들이 적의 저지선을 뚫고 소식을 전하는 과정을 본 딴 종목이라 선수들은 한번도 타보지 못한 말을 타게 된다. 이변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27일(한국시각) 아테네올림픽 근대5종에 출전한 한도령(28ㆍ대구체육회) 역시 피해자였다. 32명 중 3종목 중간합계 9위로 메달을 넘볼 수 있는 상황. 앞서 2, 4위가 말 때문에 애를 먹은 통에 가능성도 높았다.
한도령의 말은 이탈리아산 거세한 적갈색 수말 ‘바리오(BARIOㆍ11)’. 7번째 장애물에서 바를 하나 떨어뜨린 한도령은 고개를 쳐드는 바리오를 다독여 9번째 장애물(벽돌)을 넘으려 했지만 말이 서는 바람에 앞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낙마(40점)와 장애물 거부(60점) 등 100점의 감점을 당했다.
설상가상 고삐까지 놓쳐 바리오는 저만치 달아난 뒤였다. 말을 달래 다시장애물을 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시간 감점(264점)까지 감수해야 했다. 바를 떨어뜨린 감점(28점)까지 더해 808점(1,200점 만점)으로 29위(종합순위24위).
첫 올림픽 메달을 따려는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한도령은 “말이 겁에질려 주춤하길래 양 발로 꽉 조여 준다는 게 그만 속도가 붙은 데다 너무빨리 넘으려 한 게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이날 최대 피해자는 마르킨 호르바크(폴란드). 중간합계 2위로 순항하던 그는 암말 ‘알렉시스Ⅱ’가 아예 장애물 넘기를 거부해 시합을 포기해야했다. 결국 꼴찌, 알렉시스Ⅱ는 경기장에서 쫓겨났다. 러시아의 루스템 사비르쿠진 역시 최하위로 떨어지자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찰싹 때리며 분을 삭였다.
올해 세계선수권에서 승마 만점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안긴 이춘헌(24ㆍ상무)은 승마에선 9위로 선전했지만 펜싱에서 너무 많은 점수차를 내줘 결국 종합순위 21위에 그쳤다.
아테네=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