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의 조건에 대한 우리 전통의 인식은 수(壽)ㆍ부(富)ㆍ귀(貴)ㆍ강녕(康寧)ㆍ자손중다(子孫衆多)를 오복으로 꼽은 데서 드러난다. 청나라 학자 적호(翟灝)의 ‘통속편’(通俗篇)에서 나온 이 오복은 일찍이 서경(書經)이 밝힌 오복 가운데 덕 베풀기를 즐긴다는 유호덕(攸好德), 천수를 다 누린다는 고종명(考終命)을 각각 귀, 자손중다로 바꾼 것이다.서민의 현실적 희원(希願)이 반영된 결과다. 자신의 천수보다 많은 자식을 앞세운 자세는 자복(子福)을 중요한 주제로 삼았던 우리 민화에도 이어진다.■ 옛사람들이 아이 많은 것을 궁극의 행복으로 여긴 것은 본능에 침투한 유전자의 명령 때문만이 아니었다. 농업사회에서 자식은 곧 생산력이며, 출산은 단기적 부양 의무를 감안해도 노동력을 확보하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이 서민의 공감을 얻게 됐다.산업화 이후 교육비를 비롯한 양육 부담이 엄청나게 늘어난 반면 전통적 가족관계의 붕괴로 자식에게 기대할 수 있는 사회ㆍ경제적 보상은 거의 의미를 잃었다.
■ 과거 농촌의 삶과 달리 현대 도시의 삶은 끊임없는 비교 속에 놓여있다. 특히 대중매체의 발달로 이웃을 넘어 세상 모든 가정과의 비교가 일상화했다. 어지간한 부모는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늘 남들처럼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아이들도 때때로 그런 비교를 들이댄다.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뒷받침하기가 힘겹다 보니 아이 낳기가 겁난다. 통계청의 ‘2003년 출생ㆍ사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총 출생은 49만3,500명, 가임 여성 한 명의 생애 평균 출산은 1.19명으로 사상 최저 기록을 경신했다.
■ 맞벌이가 중요한 결혼 조건이 돼 가고, 보육시설 확충 등 직장 여성의출산을 위한 사회적 지원이 낙후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의 출산 기피만을 탓할 수는 없다.다만 늘어나는 평균수명, IMF 위기 이후 뚜렷해진 정년 단축, 세계 정상을 달리는 저출산 경향 등을 묶어 보면 인구의 4분의 1이 사회 전체의 부양 의무를 떠맡는 우울한 미래가 떠오른다. 먼 장래가 아니라 바로 한 세대 뒤에 닥칠 일이다. 이런 기본 조건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진정한 존재 이유일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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