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메달 딴 선수가 가장 정이 가요.”아테네올림픽 메달을 딴 환희의 순간, 멋진 소감 한마디가 빠질 리 없다.그래서 시상식이 끝나면 늘 기자회견이 열리기 마련. 미주알고주알 세계각국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니 메달을 딴 선수들 옆엔 늘 통역이 따라붙는다.
한국어 통역은 선수들의 말만 전하는 것뿐 아니라 그 느낌과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선수가 메달을 딴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두 사람은 영국에서 날아온 이종태(58)씨와 전영주(56ㆍ여)씨. 환갑이 내일 모레지만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는 차분한 의사전달과 한마디도 놓치지 않는 친절한 설명은 단연 으뜸이다.
둘은 부부다. 17년째 통역 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올림픽 동반 통역은 처음. 다른 나라 통역사들이 이것이 ‘노부부 금슬 자랑’인줄은 모르고 “외국 나와 늦바람 들었냐”고 오해할 정도다.
2년 기약으로 유학 짐 싸매고 고국을 떠난 지 올해로 22년째. 그새 여섯 살짜리 딸애는 조신한 처녀가 됐다. 타국살이에 치여 공부도 접고 부부가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든 게 통역이었다. 김대중 전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식 등 수많은 국제대회 통역을 담당했으니 이 분야에선 베테랑이다.
보수가 절반도 안 되는데다 상황예측도 안 되는 올림픽 통역을 자청하고 나선 건 “늘그막에 소중한 경험 하나 얻자”는 소박한 꿈 때문이었다. 이종태씨는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울릴 때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고, 전영주씨는 “올림픽에선 남과 북이 그렇게 친해보일 수 없다”고 했다.
영광의 순간에 자리하나 꿔 앉은 심정이겠지만 부부는 할말도 많고 겪은 일도 많다. 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자면 한정이 없으니 몇 가지만 소개한다.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은.
-“남자 하키가 독일에게 졌을 때 전재홍 감독의 말이었습니다. ‘인조잔디구장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리 선수들은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경기보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선수들에게 감사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북한의 탁구 김향미 선수가 김경아 선수에게 ‘언니’라고 따뜻하게 부르며 서로 다독이는데 눈물이 났어요. 북한 사격의 김정수 선수가 ‘친애하는 장군님’이라고 하길래 그대로 통역했더니 ‘김정일 장군’을 뺐다고 한마디 하더군요.”
부부는 이 말도 전하고 싶단다. “경기하는 모습 지켜보니까 우리 선수들 4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메달 못 따면 어때요. 다 대견합니다.”
25일 새벽(한국시각)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맛있는 해산물집을 찾아 오순도순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아테네 글ㆍ사진=고찬유기자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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