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남 의원의 여당 의장직 사퇴가 일차적으로 야기한 ‘미적’ 효과는 코믹함이다.긍정적 함의만 담긴 것은 아닌 ‘탈레반’이라는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정도로 윤리적 원리주의를 뽐내던 그가 무슨 대단한 정치적 과오가 아니라 개인 윤리 문제로 낙마했으니,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맥락이 다르기는 하나, 그저께 이 난에서 강병태 논설위원이 지적했듯 신의원은 제가 던진 부메랑에 맞은 셈이다.
원리주의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특히 언어 차원의 원리주의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탈레반’은 신 의원에게 사뭇 어울리는 별명이다.
민주당 분당을 선동하며 “호남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야 영남에서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과격한 언사로 지역주의 타파의 챔피언을 자임한 이래, 그는 현실의 복잡다단한 매듭을 선명한 언어의 칼날로 단번에 베어내며 한국 정치의 주관적 해결사 노릇을 해 왔다.
신 의원의 급진적 말버릇이 어떤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 적이 있는지는모르겠으나, 그는 한국 정치의 오묘한 파동방정식에 힘입어 여당의 대표까지 되었다.
지적해야 할 것은 신 의원의 언어적 원리주의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는사실이다.
지난 1월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 낙마를 전후해 “숭미주의(崇美主義) 사고로 가득한 외교부 대미 라인 간부들을 즉각 경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그는 6개월 뒤 미국을 방문해서는 “미국말고 우리에게 동맹이 어디 있느냐”며, 김선일씨 살해 위협을 무시하고 이라크 추가 파병 원칙을 재확인한 정부의 ‘결단’을 잘한 일이라고 추켜세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런 언어 수준의 반미 원리주의와 친미 원리주의 사이의 왕복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보여주었거니와, 신 의원의 어지러운 행보 역시 그의 언어적 원리주의가 기회주의적 원리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회주의적 원리주의자가 여당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권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그가 일본제국 군대 헌병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선친의 과거를 숨기고 외려 미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과거의 친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총궐기한 수구ㆍ보수 담론에서 주로 나왔다는 사실은 그 지적의 옳고그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전 당시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다는 선친의 경력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신의원의 천박한 역사인식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친일 행위자의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가 어떤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설령 여러증언대로 신 의원 선친의 일제 협력 행위가 사뭇 ‘악질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기남 사태의 미적 효과는 단지 코믹일 뿐인가? 오마이뉴스는 의장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고 고향으로 선친 묘를 찾은 신 의원을 취재해, 그와의 인터뷰 기사에 곁들여 그의 선친 묘역 사진을 큼직하게 실었다.
한 눈에도 호사스럽게 조성된 이 묘역과 고인의 비문 뒤에 이름을 새긴 자녀들의 면면은 신기남 사태의 미적 효과가 단지 코믹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씁쓸히 보여주었다.
코믹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 겸 무대예술가, 국회의원 겸 변호사, 의학박사 등으로 잘 장성한 자식들이 선친의 묘비에 구태여 제 미끈한 직함들을 밝혀놓은 데서는 어떤 ‘봉건적’ 촌스러움이 느껴졌고, 그것은 코믹의 한 영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고인의 자식들이 해방 뒤 어려운 상황에서 저렇게 버젓하게 자란 것이 오로지 재능과 노력 덕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그리고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후손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이 봉건적 촌스러움은 더 이상 코믹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에선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온 지랄 같은 비극의 냄새가 배어나왔다. 글피가 아흔네 번째 맞는 국치일(國恥日)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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