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룰라 대통령 당선한국과 브라질.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쌍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두 차례 공통점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선 1970년대 제 3세계로는 예외적으로 산업화를 이루면서 소위 신흥공업국으로 함께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은 계속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 갔다면 브라질은 경제파탄과 외채위기를 겪음으로써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런 두 나라는 1990년대 들어 다시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소련동구의 몰락과 함께 세계적으로 보수화 물결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브라질은 남아공과 함께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진보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 총파업으로 김영삼정권을 넉아웃시킨 민주노총이 있었다면 브라질에는 엘리트 중심의 보수정당에 대항해 룰라라는 노동운동지도자가 주동이 되어 만든 노동자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선풍적 인기를 끌며 성장한 노동자당은 2002년 대선에서 룰라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브라질과 같이 빈부격차가 심하고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엘리트 지배의 사회에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선반공 출신의 노동운동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다니, 이는 혁명적 사건이다.
이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 동안 반공주의와 지역주의 장벽 등에 막혀 실패를 계속해 오던 한국의 진보정당 실험도 얼마 전 총선에서 브라질 노동당의 형제당이기도 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하고 제 3당으로 자리잡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과거의 공산당이나 사회당과는 다른 새로운 진보정당 모델로 평가 받고 있는 브라질 노동당과 룰라의 실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친자본 정책에 기존 지지층 이탈
그러면 취임 1년 반을 넘어선 룰라정부의 중간성적표는 어떠한가? 그 평가는 갈라지고 있다. 브라질에 천문학적인 금액의 채권을 갖고 있는 국제금융자본 등은 “생각보다 잘 하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지지했던 노동자들과 진보세력, 나아가 중립적인 자유주의적인 학자들은 대부분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한마디로, “카르도소 정권을 포함한 역대 우파정권보다도 더 우경적인 정권”이자 “말만 많고 행동은 없는 NATO(No Action, Talk Only)정권”이라는 것이다(사실 많은 경우 룰라정부에 대한 브라질 진보세력의 비판은 기가 막히게 한국에서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과 너무도 똑같아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상파울로에서 만난 카를로스라는 이름의 택시기사는 노동자당의 골수 지지자로 룰라를 찍었는데 그 결과는 “거대한 국민 사기극”이라고 열을 올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당부분 룰라정부의 집권과 함께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이미 세 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초반에 잘 나가다가 급진적 변화를 두려워 한 유권자들의 우려로 패배한 바 있는 룰라는 2002년 대선의 경우 이념적 색채를 없애고 온건한 이미지를 강조한 “평화와 사랑”이라는 감성적인 캠페인을 펼쳐 지지층을 확대했다.
게다가 또 한 차례의 외환위기로 집권당의 인기가 떨어져 집권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룰라의 인기가 높아지고 집권 가능성이 커지자 룰라가 외채상환을 거부할 것을 우려한 해외투기자본들이 빠르게 브라질을 빠져 나가 경제는 더욱 엉망으로 치달았다.
룰라는 해외투기자본 등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모든 외채상환을 준수할 것이며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아니 이를 넘어서 그의 진보성을 우려하는 해외금융시장과 국내의 자본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우파정권보다도 더 우파적인 정책을 약속했다.
파우스트처럼 그는 승리하기 위해 월스트리트에 영혼을 팔아야 했고 그 덕으로 승리했을 땐 이미 모든 이빨이 빠진 종이호랑이가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진보정부이기 때문에 그 같은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우파정부보다 더 우파적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룰라정부의 비극의 핵심이다.
■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린 공약들
물론 룰라는 자신의 전통적인 지지 세력들에게는 기아를 없애고 일자리를 확충하며 의료혜택을 늘리는 한편 농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거대 지주들의 노는 농지를 사들여 분배해주겠다는 진보적인 프로그램을 약속했다. 그러나 룰라정부는 자신들이 최고의 국정목표로 삼은 재정흑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고강도의 긴축정책을 펴야 했고 따라서 이 같은 약속들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 땅에서 기아를 추방하겠다는 야심적인 포미제로 프로그램은 책상 서랍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농지분배 프로그램도 대폭 축소됐다.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의 연금을 대폭 삭감했다.
브라질의 구조적 불평등의 핵심인 교육정책도 마찬가지다.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부유층 자제들이 들어가는 대학교육 등에는 엄청난 예산을 지원해 거의 무료교육을 시켜주지만 초등학교 교육예산은 아주 적은 우민정책을 펴 옴으로써 문맹자가 50%를 넘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교육정책에도 큰 변화가 없다.
사실 룰라정부의 지나친 긴축정책에 의해 브라질은 사실 지난해 11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올해는 3.5%의 성장을 약속하고 있지만 이는 주로 수출증가에 기인하고 내수는 계속 어렵기만 하다. 게다가 수출 증가도 레알화를 평가절하해 환율을 대폭 올린 데다가 중국 바람에 의해 대두와 같은 식량으로부터 철강과 같은 원자재의 대중국 수출이 급증했기 때문이지, 룰라정부가 잘 해서가 아니다.
브라질의 옷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교포들은 “브라질 정부는 내수도 회복되고 있다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콧방귀를 뀌었다. 브라질 최고의 사회과학자로 존경을 받고 있고 장관 등으로 일한 바 있는 루이스 카를로스 브레세르-페레라 교수는 그 모든 것 중에서도 룰라정부의 가장 큰 실책은 브라질을 발전시킬 산업정책이 없고 금리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며 우울해 했다.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리오의 빈민촌 등 브라질의 거리거리에서 마주치는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은 너무 심각하기만 하다. 룰라정부의 실험은 자본이 지구적으로 움직이는 지구화 시대에, 그것도 선진국이 아닌 제 3세계에서, 과연 일국적 수준에서 진보적 정부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한다.
/손호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협찬:삼성전자
◎브라질 분석 계획센터 리몽지 소장
-룰라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를 해달라.
“평가자가 어떤 이념적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자신은 진보와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지만 룰라정부는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다.
그래도 노동자 후보이고 다양한 진보적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면 과거정권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소위 월스트리트 중심의 워싱턴 컨센서스를 그대로 따르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등 과거의 우파정권과 차이가 없다.”
-그래도 기아를 없애겠다는 포미제로 등 사회정책은 좀 다른 것 아닌가.
“사회정책은 오히려 우파 카르도소정권보다 더 후퇴했다. 카르도소정부는그래도 교육, 의료 등 사회정책을 개혁했고 개선해 나갔다. 그런데 룰라정부는 사회정책이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포미제로라는 것도 말만 있지 행동은 없는 허깨비 정책이다. 아마 기아를 실제 없애는 데보다도 이 정책 선전에 더 많은 예산을 썼을 것이다.”
-고질적인 부패 문제는 어떠한가.
“정당과 선거캠페인을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룰라정권의 2인자인 대통령비서실장이 연루된 최근의 부패스캔들이 보여주듯이 노동자당도 이미 부패하고 있고 노동자당도 다른 정당과 다른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가 유권자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결국 선거공영제를 확대해야 하는데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약에 의해 재정지출이 묶여 있어 정치자금 개혁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룰라정부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총체적인 사회개혁, 특히 진보적인 사회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당장 올해 시장 선거 등 지방선거가 있고 2006년 다시 대통령, 주지사, 의회 선거가 있는데 선거라는 측면에서는 룰라정부와 노동자당의 미래가 그리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의미 있는 대안세력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룰라정부는 “우리는 기성정치인들보다 깨끗하기 때문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같은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의외로 고전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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