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유영철의 피해유족이 경찰과 법원에 유의 선처를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이 있었다. 유에 의해 노모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까지 한꺼번에 잃은 고정원(62)씨다.전언(傳言)에 따르면 그는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면서 "그가진정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기위해 용서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면서도, 보통 사람으로는 엄두도 못 낼 크나큰 관용에 고개가 숙여진다.■ 사실 이 사건으로 사형폐지 명분은 적잖은 손상을 입었다. 신이 아닌 인간이 죄를 심판해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은 철학적, 종교적 영역의 문제여서 애당초 합의는 난망이다.현실 차원에서라면 사형폐지론의 논거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오심(誤審) 가능성이다. 아무리 엄격한 증거주의를 채택한다 해도 범죄 자체에대한 혐오와 사건해결 의지가 필연적으로 용의자에 대한 선입견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스무 차례가 넘는 살인의 증거와 자백이 명백한 사건에서는 오심 여지를 논하기 어렵다.
■ 사형제 존속을 지지하는 측에도 많은 논리가 있지만 역시 "당신 가족이 무고하게 살해됐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이 핵심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한가롭게 인도주의 따위를 운위한다는 주장이다.피해자는 사자(死者)가 돼 아무 선택을 할 수 없는데 반해 가해자는 햇빛을 즐기고 가족과도 만나면서 작으나마 존재의 기쁨을 계속 느끼며 산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나은 상황을 누리도록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따지고 보면 단순한 보복 개념을 넘어 사회정의 차원의 인식과 맞닿아있다.
■ 그러므로 피해자 유족의 선처 호소는 사형 폐지론자들에게는 더 없는 힘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영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유가 "구치소 독방에서 운동도 못하고 24시간 CCTV로 감시 당하고 있다"며 인권위에 진정했다는 얘기 때문이다. 행형 절차야 어떻든 숱한 무고한 인명을 무참히 짓밟은 그가 그야말로 존재의 작은 기쁨에 연연하는 모습을 분노 없이 지켜보기는 힘들다. 이래저래 사형제도에 대한 여러 논의를 새삼 숙고케 하는 사건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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