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최대 현안으로 돌출한 고구려사 갈등이 24일 양국의 수교 12주년을 맞아 급하게 봉합됐다. 중국이 한국 정부와 국민의 분노를 감안해 한 발 물러선 모양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국측의 고구려사 왜곡은 언제든지 재발할 여지가 높다. 양국이 24일 합의한 5개 구두 양해사항은 한국측 요구가 대부분 수용된 결과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여기에는 '고구려사 문제 정치화·복잡화 방지', '유념 의사 표명' 등 해석의 여지가 많은 외교적 수사가 가득하다.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감안해 외교적 표현을 썼을 뿐 내용은 상당부분 '우리 요구' 대로 라는 것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정치화 방지는 중국 정부 차원에서 고구려사 왜곡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표현이고 '유념' 역시 고구려사 논란이 문제가 되는 것을 걱정하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중국정부가 내년 가을부터 사용할 역사교과서 개정과정에서 고구려사 왜곡을 피하고 중국 지방정부에 대해서도 향후 역사왜곡을 중단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밝혔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신임 아시아담당 부부장은 이 과정에서 반기문 외교장관, 이종석 국가안보회의(NSC) 사무차장, 최영진 차관과 연쇄 면담을 가져 회동 시간만 9시간30분에 이르는 등 기록적인 마라톤 협상을 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모든 논란을 잠재운 것은 아니다. 특히 중국이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외교부 홈페이지 고구려사 내용 원상회복도 거부했다. 지난 2월 '고구려사를 정치문제가 아닌 학술적으로 푼다'는 양국간 합의로 돌아간 모양새다. 중국이 협의과정에서 한국 정계, 학계의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관심을 문제 삼았다는 점은 향후 논란의 불씨를 남겨둔 부분이다. 중국측은 이번 협의과정에서 "'중국정부가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내용을 한국이 초중고 교과서에 넣으려 하고 정계, 학계, 정부관련기관 발행물 등에서 '만주회복' 표현이 나온다"며 "고구려사 문제와 함께 다루자"고 또 다른 논란거리를 제기했다.
또 중국 정부가 학계와 민간 차원의 고구려사 왜곡을 방치하거나 도리어 지원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사항은 사실상 '한국국민 달래기'를 위해 중국측이 들고 나온 미봉책이라는 지적이다. 어떤 경우든 양국간 역사전쟁은 잠시 휴전에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게 중론이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외교부 당국자 일문일답- "구두양해 상당한 구속력"
외교통상부 고위 당국자는 24일 한중 마라톤 협상 결과를 설명하면서 "완전한 해결이라기보다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중국이 향후 초중고 교과서 개정과정에서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우리는 합의문 형식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제약이 있어 일단 양해사항으로 일보 진전시켜놓고 계속 풀어나가기로 했다. 교과서 왜곡이 없을 것이란 점을 우리 정부가 (언론에) 언급해도 좋겠다는 중국측의 양해가 있었다."
― 중국도 자국 언론에 설명하나.
"모르겠다. 구두양해이긴 하나 오해를 줄이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가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 복원 요구 문제는.
"중국 측은 충분히 유념하겠다고 했다. 우리측은 홈피에 고구려사 집어넣으면 가장 확실하다고 주장했지만 중국은 이미 한번 취한 조치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했다."
― 양국의 구두양해 사항에 대한 점검장치는 있는가.
"양해사항 자체가 상당한 구속력을 갖는다고 본다."
―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한 책자를 고치는 것도 구두양해에 포함되나.
"중국은 중앙·지방 정부차원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문제를 복잡해지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 지난 2월 양국 합의 당시 학술문제로 풀어나가겠다고 합의한 것 아닌가.
"우리 정부가 시종일관 주장한 게 2004년 2월 합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중국이 어긴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정치화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 '정치화'의 의미가 무엇인가.
"학계와 민간의 언행과 달리 정부 차원의 조치는 '정치화'라는 말로 구분을 했다. 중국이 이미 정치화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려를 표시했고, 앞으로 이를 피하기로 했다."
―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신임 아시아담당 부부장 방한 의미는.
"본인이 먼저 한국에 오겠다고 했다.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의 방한에 앞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으로 본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 통외통委 안팎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24일 전체회의에서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관한 한·중간 '구두양해' 결과에 대해 한목소리로 "미흡하다"고 질타했다. 의원들은 또 정부의 대응이 지나치게 미온적이라고 지적한 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학술 차원이 아닌 정치적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강도 높게 대응해야 한다"고 반기문 외교부 장관에게 촉구했다.
의원들은 먼저 한·중 '구두양해' 결과의 애매모호함을 집중 추궁했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구두양해 내용을 들으니 대단히 부족하다"며 "마치 한·중 양쪽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했는데 도무지 납득이 안가고 모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한명숙 의원은 "구두양해 내용이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의 문제점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나"라고 따져 물은 뒤, "중국 초·중·고 역사교과서는 물론 대학교재의 시정,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의 우리 역사 삭제에 대한 원상회복 등 시정을 구체화 해야 하지 않느냐"고 몰아세웠다.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도 "개별 사항에 대해 건건이 확인 받아서 답변을 받은 것이 아니다"며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을 하고 체크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당 김부겸 의원은 "구두양해 사항이 어느 정도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다. 각자에 유리한 해석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라며 우려하고 "구두양해만으로 명쾌하지 않다"고 질타했다. 반 장관은 답변에서 "문서화 했으면 좋겠지만 중국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우리 정부도 유념해서 잘 챙겨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 방식과 '정치화 방지' 방침에 대한 비판과 적극 대응 주문도 쏟아졌다. 한명숙 의원은 "중국은 남북통일 이후 영토문제와 소수민족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고구려사 왜곡을 정부 주도로 치밀한 계획하에 정치적 의도를 갖고 추진하고 있다"며 "이런데도 정부가 정치화 하지 말자며 학술교류를 통해 해결하자는 대응 방식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김문수 의원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부가 나서서 하는 것인데도 우리 정부가 일본의 역사왜곡과 달리 왜 저자세로 나가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고 김부겸 의원은 "북한과의 공동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반 장관은 "정부는 역사왜곡 문제를 최우선적 외교 과제로 삼아 치밀하게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으나, 최영진 외교부 차관은 "정부차원에서 정치적인 문제제기는 중국이 먼저 하지 않으면 안 할 것"이라며 정치화 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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