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 문턱에 섰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마음마저 소슬해지는 때다. 7월 조수미와 레오 누치의 ‘리골레토’로 올 상반기를 마무리했던 오페라도 슬슬 가을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가을 오페라는 모두 4편. 국립오페라단이 9월 ‘카르멘’을 시작으로 ‘아이다’(10월)와 ‘사랑의 묘약’(11월)을 차례로 올리고, 예술의전당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제작해 10월 공연한다. 비교적 낯설거나 국내에서 공연된 적이 별로 없는 작품이 아니고 늘 보던 것들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널리 사랑받는 걸작들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뻔하다. 허풍쟁이 약장수의 농간이 뜻밖에도 바보 같은사랑에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묘약’을 빼면, 모두 사랑 때문에 울고 미치고 죽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다. 오페라는 고상한 예술이라는 선입견 같은 건 집어치우자. TV 연속극에 빠지듯 누구나 얼마든지 즐길수 있는 작품들이니까.
사랑 타령은 지겹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귀에 와닿는 순간 곧장 가슴으로 날아와 꽂히는 극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에는 오페라를 잘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어지간한 강심장도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다. 오페라는 그렇게 마음을 쓰러뜨린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정명훈이 지휘하는 ‘카르멘’(9월 7~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가수, 연출과 무대가 탄탄해서 기대를 모은다. 프랑스 오랑주 페스티벌 위원회와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 일본 오페라진흥회가 공동제작, 7월 31~8월 7일 오랑주의 고대로마 야외극장 공연에 이어 9월 서울과 도쿄로 이동한다.
프랑스에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날아오고, 제롬 사바리가 연출과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오랑주의 주역 가수들과 한일 양국 가수들이 번갈아 출연한다. 베아트리체 우리아몬존, 빈첸초 라 스콜라, 어윈 쉬로트, 노라 안셀렘이 한 팀, 미호코 후지무라, 정의근, 김동원, 김은주가 한 팀이다.
‘카르멘’은 한마디로 뜨거운 오페라다. 뼛속까지 자유로운 집시여인 카르멘의 정열과 그녀에게 사로잡힌 군인 돈 호세의 맹목적인 사랑이 맹렬하게 충돌하며 끝내 파멸을 부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진 음악이 이어지고, 너무나 유명한 ‘투우사의 노래’를 비롯해 ‘꽃노래’ ‘하바네라’ 등널리 알려진 노래가 많아서 누구나 쉽게 빠져드는 작품이다.
예술의전당이 제작하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0월 20~2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도 놓치면 아까울 무대. 독일의 도이체 오퍼 베를린 프로덕션을 가져온다. 마르코 잠벨리가 코리안심포니를 지휘하고 필리포 산저스트가 연출하는 이 공연은 출연진이 화려하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주역 가수들을 여러 명 발탁했다.
소프라노 로라 클레이콤과 김성은, 테너 나승서와 박기천이 죽음으로 사랑을 마감하는 비운의 두 연인 루치아와 에드가르도로 각각 짝을 이루고, 여동생 루치아를 정략 결혼시켜 비극을 부르는 오빠 엔리코로 바리톤 서정학이 나온다. 로라 클레이콤의 루치아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성은은 지난해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라 트라비아타’에서 관객을 열광시켰다.
나승서는 2002년 프랑스 리옹 오페라의 ‘루치아’에 슈퍼스타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 대신 출연해 유럽을 놀라게 했다. 독일 하노버 오페라의 박기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 우승자인 서정학도 명성으로만 듣던 빼어난 가수들이다.
극중 미쳐버린 루치아가 연인을 찾으며 부르다가 죽는, 무려 20분간의 ‘광란의 아리아’는 처절한 비탄의 전율 그 자체다. 이 노래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가수가 끔찍하게 못 불렀거나 당신이 지독하게 무디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국립오페라단이 만드는 나머지 2편, ‘아이다’(10월 7~1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와 ‘사랑의 묘약’(11월 21~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도 사랑 이야기다. ‘아이다’는 비극이지만, ‘사랑의 묘약’은 해피엔딩이다.
이집트에 끌려온 에티오피아 왕녀 아이다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의 사랑은 두 연인이 산 채로 돌무덤에 갇히는 것으로 끝난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스펙터클 무대와 화려한 ‘개선행진곡’ 등 웅장하고 극적인 음악이 압권이다. ‘아이다’ 전문가수인 소프라노 하스믹 파피안을 비롯해테너 김남두, 바리톤 장유상 등이 출연하며, 리카르도 프리차가 지휘하고 디터 케기가 연출한다.
‘사랑의 묘약’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사랑의 신경전이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예쁜 처녀 를 짝사랑하는 시골총각 네모리노는 사기꾼 약장수의 싸구려 포도주를 사랑의 묘약인 줄 알고 사서 마실만큼 바보 같지만, 그 순진함은 보답을 받는다.
네모리노가 부르는 노래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유명하다.
박정원 임해철 김동식 등 한국 가수들로 출연진을 짰다. 지휘 최승한, 연출 울리세 산티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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