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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16>드라마 '모래시계' 우석, 태수를 말하다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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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50주년 기획시리즈-우리시대 주인공]<16>드라마 '모래시계' 우석, 태수를 말하다 1986년

입력
2004.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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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지난 30년간 살아 오면서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섰었습니다.그때마다 피고인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힘있는 자에게 붙어 지름길을 택하려 했습니다.(중략) 본 검사는 피고인의 이러한 제 정상을 감안하여 범죄단체 조직 및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살인 및 특수도주죄를 적용 사형을 구형합니다.”

1986년 3월 2일을 법정에서 저 강우석(박상원)은 검사로서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 박태수(최민수)에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바로 그 전날 저는 검찰 보호실에 앉아서 태수와 소주를 나눠 마셨습니다.

녀석은 얼굴에 엷은 미소까지 띄며 말했죠. “난 널 알아. 너 같은 놈이 구형을 주면 나 납득할 수 있어. 너 말고 다른 놈은 못 믿어.” 1심 판결뒤 항소를 포기한 채 사형 집행 날짜만을 기다린 것도 다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태수는 늘 그런 녀석이었습니다.

“너 전교 1등이라며. 날 한번 잘 가르쳐봐라. 그 대신 널 귀찮게 하는 놈들이 있으면 내가 정리해 줄께.” 고등학교 3학년 때 태수가 처음 제게 한제안이었습니다. 전 똑똑히 기억합니다.

“둘 다는 못해. 둘 중에 하나만 해. 공부든 싸움질이든. 그럴 수 있어?”라고 되물었던 걸. 그날부터 우리는 친구였습니다. 그 시절 태수에게는 육군사관학교 입학이란 생의 지상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기생들이술 팔고 몸도 파는 요정을 꾸려가던 홀어머니를 세상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서 였을 겁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엄혹 했던 그 시절, ‘빨치산의 자식’이라는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낙인이 찍힌 녀석의 삶에 당초부터 희망은 없었는지 모릅니다. 태수가 육사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것만으로 불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태수 어머니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뼛가루를 뿌렸던 지리산 골짜기에 다녀오던 길에 아지랑이가 아찔하게 피어 오르는 철 길 위에서 생을 마감 했습니다. 소주 한 잔에 얼큰하게 취해, 아들에게까지 ‘빨갱이 자식’이라는 오명을 물려 줄 수 밖에 없는 어미의 슬픔에 몽롱해져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 후 태수는 태양을 피해 자라나는 음지식물처럼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고저는 그때까지 굳게 잡고 있던 그 녀석의 손을 순식간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니, 삶의 유일한 끈이던 어머니마저 앗아간 세상을 향해서 등을 돌린 녀석을 향해 처음처럼 선과 악, 양지와 음지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의 염원대로 법대에 진학했고 태수는 이른바 ‘깡패’가 됐습니다.

캠퍼스에서 최루탄 가스를 맡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그 즈음 박정희가 부하의 총을 맞고 숨을 거뒀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어둠에도빛이 스며드는가 싶었지만 새로운 독재자는 더욱 무자비하고 극악한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초파일을 기념하는 연등이 시내 곳곳에 내걸렸던 광주 한 복판에 태수는 시민군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민주니 반독재 타도니 그런 건 녀석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아끼던 동생과 또 그 동생이 사랑했던 다방 레지가 자기 눈앞에서 정부군의 총탄을 맞고 싸늘한 시체로 변한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광주폭동’이라 명명된 이날의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3578부대의 부대원이었던 저는 태수를 향해 총을 겨눠야 했습니다.

태수가 뒷골목에서 휘둘렀던 주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시무시한, 한번 상처 입으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폭력이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라난 독재권력은 그리고 다시금 정의를 외치며태수를 ‘삼청교육대’로 몰아 넣었습니다. 폭력배들과 범법자들의 정신개조와 정화가 그 명분이었죠. 그러나 실은 태수가 정권에 돈줄을 쥐고 있던카지노 재벌 윤회장의 딸 혜린(고현정)을 사랑했기 때문에 받은 벌이었습니다.

지옥보다 더 악랄했던 그곳을 살아서 걸어 나온 태수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뭉그러뜨린 권력자들에게 투항했습니다. “더 이상 힘이 약해 내 여자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다짐했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 창당 작업을 방해하고 파친코를 운영해 얻는 수익금을 꼬박꼬박 헌납하고 때론 정권에 위협이 되는 누군가를 소리소문 없이 해치우기도 했습니다.

어떤 비극이나 드라마보다 더 기막힌 운명은 그렇게 그 앞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태수의 그런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는 검사였고 태수는 조직폭력배 두목이었죠.

독재권력과 조직 폭력배들과 그리고 카지노 사업사이에 얽힌 먹이사슬을 파헤치는 게 제 소명이었습니다. 제 칼은 더 이상 그 추악한 모습을 감추는 게 불가능해진 더러운 권력을 노리고 있었지만 결국 피 흘리며 쓰러지고 만 것은 태수뿐이었습니다.

죄수번호 1925번이던 태수가 서른 살, 짧은 생을 마감하던 날, 떨리는 목소리로 “그게 겁나…내가 겁 낼 까봐” 말하는 걸 눈뜨고 지켜보며 저는울었습니다.

태수 그리고 나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견뎌야 했던 그 거친, 상처 투성이의 세월 아파서 였습니다. 인간 ‘박태수’의 삶이 그렇게 종장으로 치닫는 그 시간에도 의롭지 아니한 권력은 펄펄 살아 우리 사회곳곳에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 였습니다.

태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뿌렸던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서 혜린이 태수의 유골을 뿌리던 날은 잊지 못합니다. 혜린이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 이렇게 보내는 걸로 뭐가 해결됐어?”

저는 “아직은, 아무 것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독재자도 긴급조치도 게엄군도 삼청교육대도 사라졌고 그 시절을 아파하던 비명 소리도 그쳤지만 거악(巨惡)은 여전히 뿌리 깊고 아문 듯 보이는 상처들에서는 여전히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내 청춘의 또 다른 자화상이기도 한 태수를 저는 아직도 보내지못했습니다.

/김대성기자lovelily@hk.co.kr

■그때 한국일보에는

1995년 1월 10일부터 2월 16일까지 24회에 걸쳐 방영된 SBS 드라마 ‘모래시계’는 그해 3월 2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제31회 백상예술대상에서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극본상, 신인상 등 5개 부분을 휩쓸었다.

모래시계의 최종회가 방영된 바로 다음날인 1995년 2월 17일 ‘장명수 칼럼’은 이렇게 적고 있다.

‘모래시계의 성공은 제작진의 치열한 작가 정신과 그것을 갈구해온 시청자들의 행복한 만남이다. 광주항쟁과 삼청교육대 등 지난 시대의 금기에 도전한 용기, 보는 재미를 한 차원 높인 화끈한 폭력, 빼어난 영상의 아름다움, 선이 굵은 우정과 사랑, 제도권 폭력과 부패에 대한 통쾌한 고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 대사 등 인기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힘은 시청자들을 감동시킨 제작진의 정열이었다.

작가와 감독은 그들의 젊은 날이었던 70ㆍ80년대 그 어두운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젊은이들을 우리 앞에 불러냈다.’

■ 전국민 TV앞에 모은 '귀가시계'

‘한국에서 이 드라마가 방영된 시간에는 도심의 교통마저 한산해졌고 술집의 손님도 줄었다. 시청자는 공무원, 학생, 직장인 등 다양했고 지역방송인 SBS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종영 전날인 15일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기록했다.’

‘귀가시계’ ‘멈춤시계’로 통했던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최종회가방영된 1995년 2월 16일, AP 통신은 그렇게 전세계에 타전했다. 광주민주화 운동, 삼청교육대 같은 우리 현대사에서 은폐되었던 진실들을 최초로 드라마화 한 ‘모래시계’에 대한 열기는 그렇게 뜨거웠다.

최종회 시청률이 64.5%(시청률 전문 조사기관 MSK조사 결과)를 기록 1992년 MBC의 주말극 ‘사랑이 뭐길래’ (64.9%) 이후 최고 기록을 남겼을 뿐더러 주인공인 태수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우석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간 59분쯤엔 시청률이 75.4%에 달하기도 했다.

시청률만큼이나 ‘모래시계’가 남긴 화제도 많았다. 1년에 걸쳐 제작된 이 드라마에는 총28억8,000만원의 제작비가 투입됐으며 광고수입 25억9,000만원과 협찬금 3억5,000만원 등 모두 29억4,000만원의 직접수입을 올렸다.

또 ‘모래시계’ 사운드트랙 앨범과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러시아노래 ‘백학’ 음반은 합쳐 50만장이 팔렸다. 연출자인 김종학 PD와 극작가 송지나씨, 강렬한 눈빛의 최민수는 물론이고, 보디가드 역의 이정재는 군복무 중임에도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어린시절의 태수역을 맡았던 김정현, 비열한 깡패역의 정성모 등도 조연급이지만 스타로 발돋움했다.

사회 현상은 ‘모래시계’가 열풍을 넘어 하나의 팬덤 현상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줬다.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카지노 게임이 유행하고 검도장 회원수가 급격히 증가하는가 하면 드라마가 방송 중이던 시간대에 정전 사태가 벌어진 서울중구 신당동 일대에서는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해프닝도 벌어졌고, 사우나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래시계가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김대성기자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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