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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114>초롱꽃, 세상과 코드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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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114>초롱꽃, 세상과 코드 맞추기

입력
2004.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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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가 내리고 나니 문득 바람이 서늘합니다. 하긴 입추도 지났으니 절기상으로는 계절이 바뀐 셈입니다. 그래도 아직 8월이고 우리의 산야는 여전히 초록이 무성합니다.식물이 아무리 고운 꽃을 피워내도 웬만하면 그 성한 초록 기운에 묻혀 돋보이기 어려우련만 숲에는 확실하게 눈길을 잡는 꽃이 보입니다. 주홍빛 동자꽃이 유난히 선연하고, 연보랏빛 모싯대의 빛깔도 은은합니다. 터리풀은 돋보이지 않는 작은 꽃이 가득 달려 마치 먼지 털이개 같은 모양으로 흐드러져 그 부족함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연엔 그리도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특별한 모양과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초롱꽃이 빠지지 않습니다. 희지도 노랗지도 누렇지도 않은 그 오묘한 초롱꽃 빛깔을 두고 어느 시인은‘고향집어머니가 입으시던 삼베속곳의 색깔 같다’고 했지요. 정말 자연의 빛깔을말하기엔 우리의 말과 표현은 너무 한정적이서 이렇게 추상적인 설명만이가능한가 봅니다.

초롱꽃은 색깔 뿐만 아니라 모양도 독특합니다. 초롱불, 청사초롱의 그 초롱을 닮아 이름도 그리 붙은 것이지요.

우선 초롱꽃잎은 모두 붙어 있습니다. 꽃잎을 개별 관리하기보다는 붙여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초롱꽃의 꽃통 속으로 커다란 호박벌이 찾아옵니다. 꽃의 구조와 그 꽃을 찾아오는 매개곤충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 종의 식물에한 곤충만 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한 곤충이 몇 가지의 식물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벌의 경우 그날 어떤 꽃을 한번 찾아가면 하루종일 같은 종류의 꽃만 찾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초롱꽃에는 아주 작은 벌들은 오지 않습니다. 꽃의 크기에 적합하게 찾아오는 벌들의 크기가 유지돼야 벌들은 깊은 꿀샘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꽃으로 운반해줄 꽃가루를 가득 붙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암술에 꽃가루가 묻어 근친교배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초롱꽃은 머리를 쓰게 됩니다. 꽃이 피기 전 먼저 꽃가루를 터트려 암술대에 있는 털에 묻혀놓으면, 벌이 꽃통 속에 있는 긴 털들을 헤치며 꿀을 찾아 기어 들어가면서 암술들을 등에 비비게 되고 그때 미리터져 있던 꽃가루들이 벌에 묻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꽃가루를먼저 다른 꽃들을 위해 보낸 초롱꽃은 2~3일쯤 뒤에 꽃가루를 잡고 있던 암술대의 털을 다 떨어뜨리고 암술은 암술머리를 3갈래로 열어 다른 꽃에서 날아올 꽃가루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웃나라의 한 섬에는 초롱꽃과 비슷하지만 꽃 크기가 작은 초롱꽃 사촌이분포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몸집이 큰 호박벌이 없습니다. 섬에사는 꽃의 크기에 적합한 크기가 작은 벌만 있다고 합니다. 작은 벌만 있으므로 꽃 크기가 이에 맞춰 변했지요. 급기야 종이 분화된 것일까요?

게다가 이 섬에는 작은 크기의 벌마저 꽃을 찾아다니며 꽃가루받이를 도와줄 만큼 많지 않아 섬의 초롱꽃들은 부득이 꽃가루가 터지는 시기와 암술이 성숙한 시기를 맞춰 개화합니다. 종의 생존자체를 위협받으니 어쩔 수없이 같은 핏줄의 꽃가루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세상에 나오면 당장이라도 주눅들 것 같은 순박하고 소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초롱꽃도 주어진 삶을 극복하고 개척하며 살아갑니다. 삶이란 결코만만치 않은 것인가 봅니다. 사람에게도 식물에게도.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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